홍성진 한의학 박사·송도 퍼스트한의원 원장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 어린 시절 즐겨듣고 부르던 이 노래 덕분에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금수강산이라고 알고 성장했던 필자는 생애 처음 유럽여행을 갔던 당시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분명히 한여름 날씨였는데, 긴팔 윗옷을 입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한낮 기온은 섭씨 35도를 넘기가 일쑤였는데, 에어컨이 없는 택시들이 절반이 넘었다. 햇살이 뜨겁고 견디기 힘들긴 했지만, 그늘에 들어가 있으면 아주 시원했다. 해가 지면 약간 서늘해져서 지금이 여름이 맞나 싶기도 했다. 심지어 잠잘 때 이불이나 담요가 없으면 살짝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는 돌아와서 여기저기 자료를 뒤적여보고서야 그 차이를 알게 되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 위치한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대륙 동쪽에 위치해서 한여름에는 덥고 습한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여름은 그냥 덥기만 한 게 아니라, 습도가 높은 무더운 날씨였던 것이다.

장마와 함께 시작하는 한국의 여름에는 유독 습도가 높다. 공기 중에 수증기가 많이 있다는 뜻이다. 습도가 높으면 해가 져도 공기가 빨리 식지 못한다. 그래서 한밤중에도 기온이 섭씨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잘 나타난다.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아지고, 숙면을 취하지 못하니까 낮에도 피곤하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능률이 떨어지기 쉽다.

여름이 되면 우리 인체도 계절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땀을 내보내서 열을 식히는 시스템을 가동한다. 그런데 대기의 습도가 높다 보니 땀이 잘 마르지 않게 된다. 땀이 쉽게 증발하지 못하다 보니 더 빨리 지치고, 피부도 축축하고 끈끈하고, 이래저래 불쾌지수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살아왔던 우리 조상들은 덥고 습한 여름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했을까? 정답은 바로 보약이다. 동의보감을 살펴보아도 한여름에 체력이 고갈되는 것을 대비해서 보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생맥산(生脈散)이라는 한약도 덥고 땀 많이 나고 체력소모가 큰 여름에 기운(맥)을 살려(생)주는 대표 처방이다.

그 외에도 여름철에 빈발하는 여러 증상에 맞게 쓸 수 있는 보약이 다양하다. 무더운 여름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보약을 쓰면서 체력을 안배하고 슬기롭게 더위를 헤쳐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보약조차도 쓰기 힘든 서민들은 삼계탕이나 보신탕 같은 단백질을 섭취하면서 여름을 버텼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우리나라의 여름은 보약이나 삼계탕을 필요로 할 만큼 체력소모가 큰 계절임이 사실이다.

간혹 필자 환자 중에는 여름에 보약을 복용하면 땀으로 모두 나가버려서 헛수고가 아니냐고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어차피 소화가 되어서 대소변으로 나올 텐데 식사는 왜 하시냐고 여쭤보면 대부분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우리가 보약을 찾는 이유는 뭔가 힘든 일이나 과제를 잘 수행하기 위해 미리미리 체력을 보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한의원에서 보약을 처방받은 사례를 살펴보면 특히 그렇다.
해외원정을 앞둔 등반대원의 체력보충, 임용고시나 각종 시험을 목전에 둔 수험생들의 기억력 향상과 지구력 상승, 군 입대를 앞둔 아들의 체력보강, 전국체전이나 각종 시합을 앞둔 선수들의 부상방지 등 큰 일을 앞두고 보약을 처방하는 게 거의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더위 한가운데 복날 삼계탕을 먹으러 가지, 더위가 다 물러간 추석 전에 삼계탕을 먹으러 가지는 않는다. 보약도 같은 이치이다.

한국을 떠나서 살지 않는 한, 덥고 습한 여름 날씨를 피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미리미리 체력을 키워두거나, 무더운 여름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보약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원장님 덕분에 무더운 여름을 잘 이겨내서 수능시험 잘 치렀어요", "여름 보약 덕분에 지치지 않고 업무에 집중해서 이번 프로젝트 성공했어요" 등 매년 가을에 환자들에게 듣는 기분 좋은 칭찬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한의원에서 들려오면, 올해도 무더운 여름을 잘 보냈구나 하는 안도와 기쁨에 필자도 뿌듯하고 즐거움을 느끼며 다시 진료에 매진하게 된다.
독자들도 다가오는 여름을 슬기롭고 건강하게 나시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