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지난 밤에도 또 실패했다. 잉글랜드-벨기에 3·4위전도 전반전을 다 못보고 잠이 들어버렸다. 4년 뒤에나 다시 볼 수 있겠으니 오늘은 곁에 얼음물이라도 준비하고 결승전 중계를 맞아야겠다.
▶오늘 프랑스-크로아티아 간의 결승전은 전 세계 9억명이 지켜 볼 것이라고 한다. 가히 세기적 이벤트다. 그 무엇인들 전 세계인들을 이토록 한 자리에 붙들어 둘 수 있겠는가. 오늘 밤 파리에서는 에펠탑까지 일시 비운다고 한다. 에펠탑 바로 앞에 초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10만여명이 모여 들 예상이어서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모스크바로 가는 항공·열차편이 진작에 동이 났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모스크바까지 무려 2300㎞. 열혈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스크바로 차를 몰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국 축구가 지역 예선의 벽을 넘지 못하던 시기에도 월드컵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주먹만한 활자의 신문 컷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줄리메컵은 영원히 브라질에'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소식이었다. 전설의 펠레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브라질이 '3회 우승'의 고지를 선점해 이 트로피를 영구히 차지한 사건이다. 월드컵을 창시한 줄리메 FIFA회장이 사재로 마련한 순금 트로피다. 얼마나 눈독을 들인 이가 많았으면 두차례나 도난당한 끝에 아직도 행방불명이다.
▶올해 월드컵을 돌아보면 한국은 좀 씁쓸하다. 16강 진출이 쉬운 일이 아니니 그리 탓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대 독일전의 승리가 모든 것을 덮어준 것 처럼 된 것은 본말전도다. 인천공항에서의 계란 세례는 분명 민망한 일이지만 독일을 이기려 출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하게 16강 목표를 이룬 일본을 '산책 축구'라 욕하는 것 역시 민망하다.
▶지난 3일 일본-벨기에전의 중계방송은 지금 생각해도 낯 뜨겁다. 벨기에가 골을 넣을 때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기뻐하느라 목이 쉴 정도였다. 벨기에가 역전골을 터뜨리자 해설자는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벨기에가 이겨주면 우리가 16강이 되는 줄 알았다. 아무리 사촌이 논을 샀다 해도 너무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그다지도 배배꼬인 심성이었던가. 꼬박꼬박 시청료를 갖다 바치는 공영방송이 앞장서 국격을 짓밟은 셈이다. 도저히 벗어날 길 없는 컴플렉스의 소치인가. '극일(克日)'이라는 좋은 말이 있지 않는가. 축구 실력으로 일본을 넘어서면 되는 것이다. 우리 공영방송의 해설 수준도 제발 일본의 그것을 좀 넘어서 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