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모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
주안공단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아담한 성당 하나가 있다. 삽십오륙년전 소수의 젊은 지성들이 학업을 접고 그곳 공단에 취업하였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들이었다. 야학교사였던 그녀도 1982년 겨울, 주안공단에 취업했다. 그이는 고된 하루 일과가 끝나면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홀로 본당으로 들어가 기도하였다. 본당 문이 닫혀 있으면 문 밖에서 기도하였다. 그이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은 성당뿐이었다. 그이가 날마다 조용히 오고가는 것을 알아챈 파란 눈의 신부님은 본당 열쇠를 놓아둔 곳을 쪽지로 일러주었다. 훗날 화가가 된 그이는 신부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며 고운 추억으로 그 때 그 곳을 간직하고 있다.

1986년 주안 5동 성당에는 시를 쓰는 신부님이 와 계셨다. (그 분은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분인데, 1987년 첫 시집 '차라리 문둥이일 것을' 펴냈다) 그 무렵 풍물패 '한광대'가 구성되었다. 한광대는 연습실 마련이 시급했다. 신부님은 흔쾌히 성당 지하실을 내주었다. 한광대는 이곳에서 풍물 강좌와 국악 미사를 기획할 수 있었다. 국악 미사는 신부님의 제안으로 비롯됐다. 여러 교회를 돌며 풍물 강좌를 열고 사물놀이 공연을 펼쳤다. 사물 악기를 팔고, 공연 수익금을 모아 종잣돈을 마련하였다. 이듬해 주안역 앞 건물에 문화공간 '쑥골마루'를 열었다. 쑥골마루에는 노래패 '산하'와 그림패 '갯꽃'이 깃들고 뒤이어 문화기획 상담과 지원을 하는 '일손나눔'이 합류했다.

풍물패 '한광대'를 안받침한 주안 5동 성당은 이즈음 '노동문화한마당'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문화한마당은 일종의 노동문화야학인데 교육과정은 풍물배우기, 만화극화 읽고 토론하기, 촌극하기, 잡색춤추기, 노래부르기, 깃발그림그리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만화극화는 미술동인 '두렁'이 노동잡지 '청춘' 등에 발표한 작품들을 민족미술협의회에서 소책자로 엮은 것이었다. 이 무렵 인천은 사찰과 압력이 심한 곳이었는데 시인 신부님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 노동문화한마당이 지속될 수 있었다. 밤늦게 노동문화야학을 마치고 나오면 성당 바로 뒤에 재래시장이 있어서 야참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희망을 나눌 수 있었다. 이 시절 함께했던 이들은 1987년 인천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의 이야기는 '장산곶메'가 제작한 영화 '파업 전야'에 고스란히 담겼다. 노동현장에 취업했던 소설가는 노동소설 '쇳물처럼'을 내왔고 시인은 노동시집 '대결'을 묶어냈다.

1987년 7·8월 인천지역 공단에서는 우후죽순 돋듯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일손나눔'의 상담과 지원, 그리고 '한광대', '산하', '갯꽃'의 노동현장 예술 두레패 생성을 산파하기 위한 발걸음이 잦아졌다. 쑥골마루는 밤늦게까지 불을 밝혔다. 야간 예술교실도 이어졌다. 쑥골마루의 예술소집단들은 시인 신부님과 문학비평가 교수님을 공동대표로 모시고 '우리문화사랑회'를 출범시켰다.

그 시절 인천은 노동예술과 노동문화의 부흥기였다. 공단 작업장 곳곳에서 풍물이 울렸고 노래가 불렸으며, 공단 벽에는 그림이 그려졌고, 조합 깃발에도 그림이 담겼다. 노동현장 순회 그림전도 활발해졌고 노동시가 낭송되었다.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며 함께 입은 옷 위에는 판화가 새겨졌다. 그들 곁에 예술이 있었고 예술가가 있었다. 노동자 대집회 때에는 노동자들이 역사의 주체로 나서는 것을 웅변하는 대형 걸개그림이 내걸렸다.
몇 주 전 '쇳물처럼'을 썼던 작가의 딸이 혼례를 올린다고 해서 주안역 인근 웨딩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10분 거리에 주안 5동 성당이 있었다. 옛 길을 떠올리며 성당으로 향했다. 풍물패 한광대를 키워내고 인천 노동문화의 씨앗을 보듬었던 성당 지하실은 성체 조배실로 바뀌어 있었다. 언제든지 찾아와 조용히 홀로 기도하는 곳으로 되어 있었다. 35년 전 그 곳 파란 눈의 신부님 마음이 배어난 듯하여 반갑고 고마웠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 안에서 현현하셨던 그 시절이 새롭게 떠올려졌다. 그리고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 때는 1987년 7·8월에 피어난 것들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예술적 성취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매우 특별한 시기였으며 그 때의 예술 산출물들을 거두어 내일의 유산으로 축적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지 못하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노동계가 나서든 또는 지방정부가 나서든 노동예술뮤지엄 또는 민중예술아카이브센타를 건립하여 이미 망실된 것은 어쩌지 못하더라도 남아 있는 자료와 작품을 모아 갈무리하길 바란다. 노동대중과 함께한 예술, 그들 곁에 있었던 예술가를 '오마주'하는 것은 노동자 모두를 드높이는 것이며 민중 스스로의 예술 주권을 굳건히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