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 나와 노동자 무료 대변
국회선 연금제 폐지 등 제안
의원들 눈총에도 소신 지켜
▲ 1989년 인천 부평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문병호(맨 오른쪽) 후보(위쪽 사진). 19대 국회의원 시절 문 후보가 해양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사진제공=문병호 후보 선대위
서울대 법대와 변호사, 재선 국회의원, 대법관 부인까지. 바른미래당 문병호 인천시장 후보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어쩌면 '대한민국 1%'로 불릴 수도 있는 인생 궤적이었다.

하지만 문 후보는 평탄한 길을 애써 마다했다. 겉으로 보이는 경로는 온전히 그의 삶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사법연수원생 때 집단행동부터 노동변호사, 시민운동가로의 선택이야말로 그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삶의 단면이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그는 '특권 내려놓기'에 앞장서 변화를 이끌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현실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문 후보는 1959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광주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한 그는 재수 끝에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며 민주화 운동 길에 접어들었고, 지명수배까지 당했다.

1986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문 후보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부평으로 향했다. 당시만 해도 부평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법원과 거리가 멀어 변호사 사무실도 없었다.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이 활발해졌지만,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아 법에 대한 갈증이 커지던 때였다.

사법연수원생 시절 노동법학회를 만들고, 대법원장 임명 반대 서명을 주도했던 문 후보는 1989년 부평에 변호사 사무실과 무료 노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대우자동차노동조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 인천여성노동자회 등 변호를 맡으며 노동자의 대변자가 됐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문 후보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다. 올 초 정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국회의원의 해외 시찰 문제를 앞서 짚은 이도 그였다. 문 후보는 2004년 외유성 출장 심사제를 제안했다. 다른 의원들의 눈총과 반대가 이어졌지만 "국민 혈세가 낭비되면 안 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회의원 연금제 폐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원 연금을 나라 살림에 보태자"며 소신을 지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사법위원장, 인천참여자치연대 공동대표 등을 맡으며 시민사회 영역으로 보폭을 넓힌 그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 선언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문 후보는 2010년 펴낸 책 <목요일 새벽엔 김밥을>에서 "시민운동 단체에서 느꼈던 현실적 한계들을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실현시켜보자고 마음먹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듬해에는 열린우리당 창당에 뛰어들었고, 2004년 총선에서 부평구갑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정치인으로의 '인생 2막'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8년 총선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과 인천시당 위원장으로 인천의 미래를 고민했고, 19대 국회의원으로 돌아왔다. 2015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며 국민의당 창당 주역으로 나섰다. '제3의 길'로 정치 혁신을 이루려는 판단이었다.
이듬해 20대 총선에서 단 26표차로 낙선했지만 지난해 국민의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정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지방선거를 한 달여 앞둔 지난달 14일 그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합쳐진 바른미래당의 인천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문 후보는 "인천의 도약을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시민 편에서 시정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시장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변호사로 부평 땅을 밟았던 30년 전도, '인천 중심 시대'를 열려는 지금도 문병호의 눈은 시민을 향해 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