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류의 시원이 맞닿은 동서양 문명 접경지
▲ 조지아 트빌리시의 상진인 나리칼라요새
▲ 고르가살리 동상과 메테히 교회
▲ 트빌리시의 기원인 유황온천지
▲ 나리칼라요새에서 본 트빌리시 전경.

수많은 외침에도 꿋꿋이 '나리칼라요새'처럼 서 있다


강대국 침략·지배 받아온 역사수도 트빌리시,

유황온천 유명 4세기 중반 건설 '나리칼라요새'

훼손·중건 되풀이 … 관광지 각광

과거 레닌광장 현재는 자유광장

신생 독립국으로 'EU 가입' 분투



코카서스 지역은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코카서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동서로 카스피해와 흑해, 남북으로 이란, 터키 및 러시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옛날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중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원유와 가스 등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강대국들이 늘 관심과 눈독을 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조지아는 세 나라 중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조지아는 러시아 남하정책의 최단거리에 위치하고,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이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있어서도 최적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사뮤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에서 '단층선 분쟁'이라고 정의했는데 조지아의 지정학적 위치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조지아는 고대로부터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로마와 페르시아제국, 몽골과 티무르, 오스만튀르크 제국 등이 조지아를 차지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조지아도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하였다. 처음에는 러시아어로 '그루지야'로 불렸지만 이제는 영어식 발음인 '조지아'로 부른다. 조지아라는 국가명은 토템신앙의 '늑대'를 뜻하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시작되었다는 설과,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비옥한 땅과 기후, 천연의 풍광을 지닌 곳이기에 조지아인들은 후자를 선호하는 듯하다.

하지만 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고 한다. 조지아어로 '조지아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인류의 시원과도 연계가 되어있는 자긍심 높은 말이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있는 역사박물관에는 조지아에서 발견된 원시인류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호모 에렉투스 게오르기쿠스'로 불리는 160만 년 전의 직립보행원인이 있다. 조지아 지역이 오래전부터 인류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도인 트빌리시는 여타 국가의 수도가 그러하듯 므츠바리 강이 흐른다. 쿠라 강으로 더 잘 알려진 강을 따라가면 코카서스 관광의 중심도시답게 고대의 유적들이 현대의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며 들어서 있다. 이 강은 터키서부터 조지아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로 이어진다. 고대 실크로드 대상들은 이 강을 통해 조지아를 거쳐 카스피 해와 터키를 오갔다.

트빌리시가 조지아의 수도가 된 것은 5세기말이다. 그 이전에는 므츠헤타였다. 이곳이 수도가 된 것은 조지아왕국의 왕인 바흐탕 고르가살리에 의해서다.

그가 어느 날 매를 들고 꿩 사냥을 하러 숲이 우거진 이곳에 들렀다. 그런데 꿩을 잡은 매가 뜨거운 연못에 빠져 죽은 것을 보았다. 그곳에 온천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따뜻한 물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 트빌리시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이곳은 유황온천이 유명해졌고 지금도 터키식 온천탕은 인기가 높다.

쿠라강이 흐르는 절벽 위에는 고르가살리의 동상이 우뚝하다. 그 옆에는 트빌리시 창건신화가 전해져오는 메테히 교회가 있다. 교회는 장엄하거나 웅장하지 않다. 켜켜이 다른 이미지를 보듬은 채 단아하게 서있다. 로마제국시기부터 구소련시기까지 겪었던 트빌리시의 풍파가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듯하다.

나리칼라요새는 트빌리시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트빌리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므타츠민다 산에 위치한 이 유적은 4세기 중반에 건설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수많은 외침을 겪으면서 훼손과 중건을 되풀이해왔다. 오늘날은 케이블카가 오르내리며 트빌리시를 조망하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요새 옆 가파른 능선에는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있다. 건국 1500년을 기념하여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는 20미터다.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도 어머니의 상이 있다. 이 어머니상은 돌로 만든 것으로 52미터다. 아르메니아 어머니상은 육중한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앞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이고, 조지아의 어머니상은 왼손에는 와인 잔을, 오른 손에는 칼을 들었다. 친구에게는 와인을 선사하지만, 적에게는 칼을 쓴다는 의미다.

구도심의 중심은 자유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자유탑 꼭대기에는 말을 타고 용을 무찌르는 성 조지상이 있다.

이 광장 역시 예전에는 레닌광장으로 불렸다. 구소련시절, 레닌 사후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다.

그는 무자비한 숙청과 개인숭배, 공포정치로 당시 소련을 좌지우지했다. 연해주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것도 스탈린의 지시였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조지아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조지아에도 스탈린의 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고향인 고리의 박물관에만 있을 정도다. 하지만 스탈린에 대한 조지아인의 생각은 다 나쁘지만은 않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같은 조지아인이기 때문이리라.

1980년대 개혁, 개방을 외친 고르바초프를 도와 부패와의 전쟁을 폈던 세바르드나제 역시 조지아 출신이다. 그는 조지아 독립 초기에 고국으로 돌아와 대통령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집권하고도 측근들의 부정과 부패는 만연했다. 그는 공산당시절 부정부패를 일소했지만 정작 수족들의 행위를 잘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부정선거 시비까지 겹쳐 2003년에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조지아인들이 벌인 장미혁명의 결과였다.

 


독립 후, EU에 가입하기 위해 분투 중인 조지아. 그런 조지아인들은 세바르드나제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신생독립국의 시민들은 위정자의 부정부패가 핍박과 공포정치보다 더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인가.

/인천일보 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작가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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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시킨공원의 푸시킨상.

조지아인 존경받는 푸시킨

톨스토이·고리키·이태준 작품도


코카서스는 많은 러시아 문학가들의 사랑을 받은 곳이다.

특히, 조지아는 시인 푸시킨이 사랑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트빌리시의 유황온천을 체험하고는 '최고의 온천'이라고 감탄했다. 또한 '코카서스의 죄수'라는 장편시도 썼다.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공원'이 있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분수대 뒤에 푸시킨의 동상이 있다.

조지아를 사랑했던 시인이 이제는 조지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설가 톨스토이도 코카서스 주둔군으로 자원하여 4년간 복무했다.

이를 소재로 몇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소설도 썼다. 소련의 대문호인 막심 고리키도 트빌리시를 좋아했다. 페인트공 생활을 하며 창작에 열중한 고리키는 이곳에서 처녀작을 발표했다. 고리키는 이때 사용한 필명인데, '비통한 자'라는 의미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조지아는 우리나라 작가들과도 인연이 깊다. 일제 강점기 소설가인 이태준은 1945년 해방 직후 조지아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이곳을 여행하고 <소련기행>이라는 책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