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충남 보령 출신으로, 입담이 건 이문구라는 작가가 있었다. '개갈 안난다'는 그 곳 방언을 서울까지 물어나른 장본인이다. 1991년에 유자소전(兪子小傳)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유(兪)모라는 고향 친구의 일대기를 소설로 풀어놓았다. 여러모로 별쭝난 유가는 서울에 올라와 재벌그룹 총수의 승용차를 몰게 된다. 소설은 '이 총수도 화물차 운전으로 시작해 항공사업까지 겸하는 운송그룹을 일군 사람'으로 묘사한다.
▶어느 날 총수는 정원의 연못에 비싼 수입 비단잉어를 풀어 놓는다. 얼마 안 돼 연못의 시멘트 독을 못이겨 잉어들이 떼죽음한다. 너무나 애통해하는 총수와는 달리, 유가는 자택 보일러공 등과 함께 매운탕으로 끓여 먹는다. 뒤늦게 이를 안 총수는 분기탱천한다. "그 불쌍한 것들을 고이 묻어주지 않고 그걸 술안주 해서 처먹어버려?" 총수는 자택에도 불당을 두고 있었다. 유가는 이 불당의 청소 담당이기도 하다. 어느 날 불상에 묻은 파리똥을 침을 뱉어 닦다가 총수에게 들키고 만다. "너 내집에서 당장 나가" 하루 아침에 유가는 그룹내 최정상의 기사에서 교통사고 처리반으로 쫓겨난다.
▶지난 주말에도 대한항공 직원들의 가면집회가 열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가 아니라 '절을 위해 주지가 떠나라'는 것이다. 위의 소설 속 총수가 이번 항공사 갑질의 할아버지가 맞다면, 그 할아버지의 그것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쩌다 3대를 내려오는 사이 이렇듯 악성으로 진화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총수 가문의 악성 갑질은 10여년 이전, 인천에서도 이미 위세를 떨쳤다. 총수의 며느리는 단칼에 대학병원장을 집에 보내 버렸다. 30대의 손녀는 부친의 친구인 대학총장의 면전에 서류를 집어던지며 역시 집으로 보냈다.
▶1993년 당시 43세로 대한항공 사장에 오른 조양호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전문경영인의 길을 갈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 해 누가 써 준 얘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딸들이 회사쪽으로 엄청난 자살골을 넣었으니 결과적으로 전문경영인의 인사는 실패한 셈인가.
▶삼성이 경남 의령 태생이듯 한진그룹은 인천이 배출한 재벌이다. 인천의 옛 일에 밝은 사람들은, 이 기업의 창업주가 한번도 인천이 고향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인터넷 검색에도 출생지가 서울로 돼있다. 충남 서해안 지방에 '뱃것이 슴것더러 상것이란다더니먼'이란 속담이 있다. 뱃사람이 섬사람더러 상스럽다 한다는 거다. 내세울 거 없다고 뿌리를 부정하는 '출신세탁' 정서가 대를 이어 가면 악성 갑질이 되는 걸까. 며느리든 손녀든 '이런 상것들이 어디 감히'하는 식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증명이 필요한 가설에 불과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