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한국 근대화 초석 다진 230명의 기록
▲ 김성수 지음, 관세청, 450쪽, 비매품
▲ 정대호 선생이 안중근 의사 의거 협조자로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피의자로 촬영된 모습. 그는 인천해관에 처음 배치를 받은 해관원이었다.
▲ 독일인 라다거(Ladage)의 묘비.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묘지에 조성되어 있던 당시 사진이다. 그는 인천해관에 배치된지 3년만에 전염병으로 희생된 첫 해관원이며 2017. 5월 인천가족공원내 묘역으로 이전됐다.
'개항과 함께한 구한말 해관 직원들(1883~1905)'은 개항초기 20년 동안 해관(세관)에서 일한 사람들의 인적사항과 그들에 관한 각종 자료를 조사·분석해서 기록한 책이다.

개항 이후 1883년부터 1905년까지 인천해관과 부산해관, 목포해관, 군산해관에서 일한 한국인을 비롯해 독일인과 미국인, 영국인, 청국인 등 10여개국 230명의 인적사항 등을 담았다. 이 책은 개항초기 해관원들이 남긴 파편적인 정보에 근거해서 그들의 인적사항과 활동내용, 해관문서(회계보고서·통지문·영수증 등)를 일일히 찾아내서 관련 사료를 곁들여 총정리했다. 개항기 관세 행정 등 관세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134년 전 부산과 원산, 인천에 허름한 해관(세관)이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외국인들이 관세사무를 집행했다. 이후 해관은 관세 등 징수를 통해 근대화 자금을 만들고, 개항장 측량, 수로조사, 기상관측을 했으며, 항만수축, 검역 및 우편사무 등을 시행해 근대화의 초석을 놓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조선해관은 1883년 청나라에서 일하던 외국인들과 청나라 해관을 경험한 사람 20여명이 입국해 창설했다. 이듬해부터는 최초의 관립 영어학교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한 조선의 우수한 자원들이 매년 각 해관에 배치됐다. 청나라 해관에서 1905년까지 약 20년 동안 조선해관 근무자를 계속 보냈으나 자발적으로 찾아온 외국인들도 있었다. 1897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는 바뀌고 추가 개항이 이뤄졌어도 해관원들은 한결같이 관세국경에서 일하며 우리나라 근대화를 도왔다.

그 중 조선인 해관원들은 신학문과 문물을 체험하면서 국가가 처한 현실을 깨닫고 야학을 열고 학교를 세웠으며, 더러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해관 직원들은 일정기간 근무 후 모국이나 청나라 해관으로 복귀했으나 일부는 병이나 사고로 사망해 가족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땅인 서울,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장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집필자 김성수 울산세관 감시과장은 "이 책은 개항기 20년간 조선해관, 대한제국해관에 근무한 사람 약 230명의 이력을 정리한 것"이라며 "조선인을 포함해 세계 10여개국에서 온 외국인들에 대한 인사기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김 과장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근대사의 조력자 역할을 담당한 해관을 소개하기 위해 출간했다고 밝혔다.

김영문 관세청장은 발간사 '개항과 세관의 역사'에서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서명한 조미수호통상은 조선의 관세주권을 되찾는 희망의 신호였다"면서 "해관에 근무한 사람들의 사료가 단편적이어서 책으로 엮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누락된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이 기록이 의미있다고 나름 자평하는 것은, 구한말 조선의 근대화 시기 개항장 그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남긴 그 희미한 흔적을 일일이 찾아 기록한 책자라는데 있다"고 밝혔다.

한편, 관세청은 10여년전부터 우리나라 개항사 사료발굴에 남다른 노력을 해 오고 있다. 2007년 인천해관문서 영인본 발간을 시작으로, 사진으로 보는 한국세관 130년과 부산해관문서 영인본 발간 등 의미있는 사업을 지속해 오고 있어 사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 어떤 자료들이 등장할 지 기대된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