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했던 삶, 굵고 짧은 詩가 되다
▲ 시집을 보고 있는 벌터 경로당 할머니들.
▲ 벌터경로당 외관.
▲ 한춘자 할머니.
▲ 김명순 할머니.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하기 쉽지 않다는 글쓰기. 여기 생업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글쓰기가 펼쳐지고 있다. 초등학교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할머니부터 일반 회사원, 대학생 등. 이들의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일상이 그대로 담겨 있거나 꿈꾸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작가나 시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써내려간 글이 담긴 책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든다.

▲한마디 말이 모두 '인생 시(詩)'

'길면 나빠 / 사연이 나와 / 길면 나빠 / 전설이 나오잖아' - 한춘자의 '시'

박설희 시인은 벌터경로당 어르신들의 시집 '인생이 다 시지, 뭐' 중 한춘자 할머니가 지은 '시(詩)'에 감탄했다.

고통의 연속이었던 시간을 짧은 시 하나로 표현한 할머니의 입담이 인생에 대한 촌철살인으로 뇌리에 각인된다.

한춘자 할머니는 "그냥 쓰는 거지, 뭐"라며 "고생도 길면 긴 고생이지 않느냐. 그야말로 불쌍한 고생이다. 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경로당) 사람들 중 고생 안 한 사람 있으면 손들어봐라. 다 고생했다"고 밝혔다.

고생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암울한 시대상은 물론 시집살이와 살림살이 등 허리를 펼 수도 없고, 목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었던 여인의 일생 그 자체였다.

한춘자 할머니는 "살아온 것을 이야기했다. 결혼식 이야기, 친정에서 첫날 자고 시집으로 떠나는 이야기들"이라며 "어쩌고저쩌고 말하면 선생님들이 써줬다. 선생님들에게 많이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신랑이 우리집에 와서 초례를 지냈어…(중략)…그거 먹고 한 밤 자고 / 이튿날 신랑 집으로 갔지 / 우리 집을 떠났지' - 김옥순의 '내 결혼'

'가을에는 가을들 벼 베러 갔지 / 벼를 얼마나 많이 벴는데 / 옛날엔 낫질 좀 했지 / 닷 마지기 맡아가지고 도급으로 매는 거야 / 그거 다하려면 숨도 못 쉬어 / 그렇게 돈 벌어 살았어(후략)' - 김순분의 '그렇게 살았어'

혼례를 치르던 날을 떠올리던 할머니들은 옛 시절 저마다의 고생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우리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큰집에서 살았는데 고생을 엄청 했지. 큰엄마가 되게 착했다. 정말 없이 살았어."

"우리네가 살아온 것은 젊은이들은 몰라. 연탄불을 떼고 방 하나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 사람도 있다. 시집 간 날부터 시어머니와 한방에 살았어."

"아들 지키려고 한 방에서 살아야지. 며느리가 아들 데리고 도망가면 어쩔 거냐. 하하."

벌터 경로당 할머니들의 시는 지극히 힘든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풍성했고, 운율이 있고, 삶에 대한 철학도 묻어 나왔다. 시집 발간을 도운 이정훈 시인과 송혜숙 소설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글로 담으면 충분했다.

▲'고생'이라는 글자에 담긴 여인의 일생
수원 권선구 서둔동 벌터경로당 1층에는 삼삼오오 모여 앉은 할머니들이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초록색 담요 위에서 펼쳐진 꽃놀이 삼매경이다.

경로당 한쪽에 놓인 소파 옆에 둘러앉은 할머니들도 시집에 자신들의 시를 보탰다.

'엄마가 최고지 / 애들에겐 엄마가 최고지…(중략)…사랑해 / 보고 싶어요 / 늙으니까 엄마생각이 더 나 / 갈 때가 되니까 그런가' - 박정숙의 '엄마'

시집에 4개의 시를 올린 박정숙 할머니는 '엄마'와 '남편' 두 단어에 눈시울을 붉혔다.

박정숙 할머니는 "지금도 그렇지만 엄마라고 이야기하면 눈물이 난다. 엄마가 그리워서 그렇자"며 "유난히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에게 의지를 많이 했기 때문인데 지금은 좋은 시절이지만 그때는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해서 그 모습이 떠오르는 거다"라고 고백했다.

이어 "남편이 6·25전쟁 때 군대에 가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 포로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서 살기도 했고, 논두렁에 납작 엎드려서 살았다. 세 번이나 죽다 살았다고 했다"며 "그런데 군대에서 나와서도 고생했다. 그때는 살기 위해 아르렁거리면서 지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서로 불쌍하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시집에는 할머니들의 남편에 대한 다양한 생각도 담겨 미소를 이끌어낸다.

'조금 아는 사람인데 / 건강하세요' - 강정희의 '남편'
'새대가리 같은 /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가지' - 김흥섭의 '남편'

'미련곰탱아 /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니 / 한 번 가더니 왜 안 와? / 거기가 그렇게 좋은 데야 / 거기가 그렇게 좋은 데야 / 꿈에서 만나 한 번 따져보자' - 정순자의 '남편'

할머니들은 부모로부터 "여자가 무슨 공부"라는 말을 들으며 못 배웠던 한도 쏟아냈다.

그래서 자식은 어떻게든 더욱 공부를 가르치려고 애를 썼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할머니들이 겪은 과거의 고생과 경험은 그렇게 시어로 쓰여 현재의 자식과 미래의 후손에게 소중한 역사로 남겨지게 된다.

김응섭 할머니가 무심코 던진 "시가 뭐긴 뭐야 인생이 다 시지'라는 말이 곧 '인생이 다 시지, 뭐'라는 인상 깊은 시집 제목으로 남겨진 것처럼 말이다.

▲벌터경로당 글쓰기 비법은? '인생쓰기 수업'
벌터경로당 어르신들의 시는 수원시가 주최하고 경기문화재단과 머리에 꽃 네트워크가 주관해 문화 재생 및 공동체 문화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벌터마을'의 '인생쓰기 수업'을 통해 시집으로 묶여 나올 수 있었다.

벌터마을 어르신들은 지난해 4월5일부터 11월8일까지 매주 수요일 2시간씩 진행된 인생쓰기 수업에서 생생한 삶의 언어를 쏟아냈다.

32명의 어르신들이 참여해 총 88편이 수록된 시집 '인생이 다 시지, 뭐'는 자기소개를 비롯해 첫사랑, 첫 소풍, 엄마에게 쓰는 편지, 늙어서 좋은 일 세 가지, 10살만 젊었더라면,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쓰기 등 다양한 주제를 그림그리기와 글쓰기, 이야기 나누기 등의 활동의 결과물이다.

박성희 벌터마을 커뮤니티하우스 문화마실 디렉터는 "어머니들이 글을 쓰실 줄 알았는데 못쓰시는 분이 많아서 입말을 그대로 옮기자고 해서 어머니들이 말한 것을 녹취해서 다시 그대로 시집에 실었다"며 "송혜숙, 이정훈 선생님이 18번 수업하면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나온 말들이 시가 됐다"고 말했다.

'인생이 다 시지, 뭐'는 벌터마을 커뮤니티하우스 문화마실(031-227-1938), 서둔동 주민센터, 경기상상캠퍼스, 서수원도서관, 호매실도서관, 선경도서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