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복 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동력이 딸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으니, 꽤 오랜 시간을 두 바퀴에 의지하며 살았다. 철저한 균형감각과 주변 상황에 대한 냉엄한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 두 바퀴에 얽힌 삶이라 자평해 본다. 이날 이때까지 몸을 떠받쳐주던 오토바이들을 셈해 보니 족히 20대가 넘는다. 거의 사용 불능할 정도로 제 몸을 희생했건만, 여건 상 떠맡아 보관할 수 없다는 회한이 교차되었다. '연도 별로 실물로 나열해 봤더라면'이라고 욕심을 가져보지만, 그나마 멀쩡히 살아남은 스쿠터 한 대를 애지중지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물론, 25년 넘도록 풍찬노숙하고 있는 뜨거운 심장(Vulcan 500)을 가진 다른 한 대가 바람 빠진 바퀴 위에서 위태롭게 낡아가고 있는 것 외에는 말이다. 전국 각지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고생했고 잔 고장 없이 역마살 든 주인을 보좌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서인지, 주인의 애잔한 눈길에 전혀 미동도 않고 있다.
한 달에 4만원 정도 주유를 하면 인천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40년 넘도록 오토바이를 타다 보니 시야도 넓어지고 어지간한 인천지리는 간판만 알려줘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요즘처럼 도심 속 뉴타운 건설로 새롭게 단장하는 지역을 컴퓨터로 미리 검색해 찾아가는 것 외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도로도 비교적 잘 정비돼 있고 이정표 또한 요소요소마다 비치돼 있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처럼 옥에 티 정도로 느껴지는 아쉬움은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예를 들면, '숙골로'라든지 '용현사거리' 등의 이정표는 인천지명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조악함이었다. 봄에 생장하는 쑥을 특징 삼아 부르던 지명을 '숙'으로 표기한다거나, 고갯길 용현(龍峴)을 용현(龍現)으로 한자까지 병기해 버젓이 내건 이정표는 그야말로 무식의 극치였다.

인천시를 비롯해 기초자치단체에서 몇 년 넘도록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걸 보면, 관심의 영역이 아니거나 인천사람 정체성을 보듬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데 어찌 인천가치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하겠다는 것인지 허공에 뜬금을 그려 넣는 일로 보였다. 유럽의 경우 우리가 시시콜콜하게 넘어갔던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무수한 장면들이 목격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떠나 독일 뮌헨으로 가는 길은 살라크(Saalach)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을 넘어야 했다. 도시의 변방 이미지가 주는 고즈넉함은 유럽 시골의 전형을 느끼게 해주었다. 말이 국경이지 우리처럼 국경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은 어디서든 찾아 볼 수 없었다. 편의점에 들러 커피 한 잔 받아들고 무심코 공사 현장에 눈길이 머물렀다. 맨홀 공사였다. 우리네 공사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작업의 속도는 물론이고 맨홀의 뚜껑 높이와 도로면이 거의 수평이 되게끔 자를 대고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깔끔한 뒷마무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맨홀을 밟고 지나가는 차들에게서 요동치는 것조차 느낄 수 없었다.

스쿠터를 타고 대로를 달리다 보면, 끝 차선은 이륜차 주행로이자 각종 맨홀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험에 의하면 거의 도로와 수평을 이루지 못하고 오토바이 무게에도 덜그럭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곡예를 방불케 했다. 인천에서 살아온 삶이 이런 거였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끔찍할 거란 생각을 해봤다.

모차르트가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고 가장 초라하게 장례식을 치렀던 비엔나의 성 스테판 성당 길은 팔뚝만한 돌 뿌리들을 촘촘하게 박았는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 외벽의 검은 때를 없애는데 가는 모래를 오래도록 분사시키는 것을 보고, 이른바 개항장 돌집이라 부르는 일본 제일은행 외벽을 화학약품으로 닦아내던 우리 방식과도 비교해 보았다. 같은 목적의 다른 방법이라 해도 좋고 남의 나라 방식과 우리네 방식과의 차이점이라 해도 좋다. 번번이 뜯어내 덮어씌우거나 파인 곳 땜질해 놓은 도로의 모양새를 보면, 진득한 이미지보다는 '땜빵 문화'의 상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지난한 숙제임이 분명하지만, 그 언젠가의 시작이 오늘부터라는 것에는 조바심을 놓을 수 없었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메트로폴리탄 인천을 떠받치는 밑돌 하나를 괴는 일과 동일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