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꽃샘추위가 물러갔으니 도리킬 수 없는 봄이다. 겨우내 황량했던 출근길 버스 정류장 주위도 신록의 풍광이 경이롭다. 갓 돋아나는 은행나무 새순은 생명의 섭리를 일깨운다. 갓 움튼 새순인데도 은행잎답게 부채꼴 모양이라니.
▶돌아보니 지난 식목일에는 종일 촉촉이 봄비가 내렸다. 뜬금없이 '식목일 공휴일 환원'이 청와대 청원에 올라오고 '나무 심을 곳이 별로 없다'는 검색어도 보였다. 고약한 댓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독재정권이 돈을 빼돌리느라 싸구려 나무만 심었다'다는 것이다. 뭘 좀 알고서나 나불대든지. 저 자랑스런 우리 숲을 놓고도 민주, 독재 타령인가.
▶그야말로 '헐벗은 산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절반이 벌건 황토흙의 민둥산이었다. '가도 가도 황톳길(한하운)'이 실감나는 시절이었다. 10여년 전 평양 교외에서 보았던 산들이 꼭 그랬던가. 보릿고개가 무섭던 시절이니 산 걱정은 사치였다. 달리 땔감도 없으니 갈수록 피폐해갔다. 비만 오면 민둥산이 휩쓸려 홍수와 흉년이 되풀이 찾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다. 당장의 끼니가 아쉬웠던 반 세기 전, 그 시절에 온 국민이 나무 심기에 나섰으니. "서독과 일본에서 가장 부러운 게 검푸르게 울창한 숲이었다" 지금은 몹쓸 독재자로 찍힌 한 양반이 맨 앞장에 섰다. 그래도 그 때는 몰랐다. 우리도 언젠가 기름진 숲의 나라가 될 줄은.
▶1960년대 후반, 고향의 국민학교(초등학교) 고학년들 모두는 수업을 마친 뒤 인근 야산으로 올라갔다. 싸리 씨앗 채취를 위해서다. 한 여름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 싸리 나무는 가을이면 까만 씨앗을 맺는다. 고사리 손들이 따모은 씨앗들은 인근 사방사업 현장으로 보내진다. 민둥산에 나무를 키우려면 먼저 산비탈의 흙을 붙들어 두어야 한댜. 여기에 싸리나무가 제격이다. 이 작은 씨앗들이 숲의 나라 대한민국을 일군 셈이다.
▶워낙에 나라가 가난했다. 요즘같으면 펑펑쓰는 세금으로 해결할 싸리 씨앗을 고사리 손을 빌린 것이다. 민둥산을 되살리는 사방사업에도 노동력은 주민들 몫이었다. 1970년대 고교생이면 교련복을 갈아입고 송충이 잡으러 산을 올랐던 기억이 있다. '입산금지'와 '산불조심'은 국민 공중도덕이었다. 이처럼 눈물겨운 30여년을 통해 성취한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유일의 산림녹화 성공국(UN식량농업기구)'을. 나라가 망하기 전 숲이 먼저 망하는 법이라고 했다. 이제는 오나가나 울창한 산이라고 대수롭게 여길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