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으니
▲ 미군에 의해 자행된 미라이 학살 당시 희생된 베트남 민간인들.
▲ 베트남 고백(Go Back) 여행 다큐영상 보기
미군, 미라이 민간인 504명 학살
1년 뒤 사진과 함께 기자가 폭로
지휘관 1명만 처벌→감형→해제
한국 정부도 공식적 사과는 안해



전쟁은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을 낳는다. 베트남은 특히 장기간의 전쟁 역사를 거쳤다. 항불전쟁(1946~1954), 항미전쟁(1955~1975), 캄보디아 전쟁(1977~1991), 중국과의 전쟁(1979) 등으로 폭력적 죽음을 맞은 많은 전쟁 유령들이 베트남 곳곳을 떠돌고 있다.

프랑스 군인, 알제리 용병, 미국군 유령, 한국군 유령 등. 특히 한국군 유령은 떤카이의 작은 마을의 오솔길을 따라 옛날 마을 연못가에 마을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할 때마다 연못으로 뛰어들어 숨는다고 한다. 그 근처에는 한국군 병사의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권헌익(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교수에 의하면 "베트남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혼(hon)이라는 영적인 영혼과 비어(via)라는 물질적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망자의 영(spirit)은 물질적인 영혼을 통해 추위와 배고픔을 느낄 수 있고, 이러한 느낌을 그 영적인 영혼을 통해 자기연민이나 분노로 변환할 수도 있다. 유사하게, 전쟁으로 인한 폭력적 죽음의 경우에 발생하는 육체적 고통의 경험은 망자의 물질적 영혼 속에 남을 수 있고, 그 영적인 영혼은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생각해내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이런 배고픔이나 갈증, 그리고 분노나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영혼이며, 인간의 영혼이 우호적(비어 라인, via lanh)이거나 사악(비어 즈, via du)할 수 있는 것 또한 바로 이 물질적 영혼을 통해서이다"라고 그의 저서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산지니 출판사, 2016)에서 밝히고 있다.

이국 만 리 타향에서 떠도는 '한국군 유령'은 과연 어떤 사연으로 베트남의 농촌 마을 연못가를 아직도 헤매고 있으며 굶주림과 갈증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을까? 그리고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한국군 유령과 더불어 수많은 베트남 전쟁 유령들은 여전히 지금도 구천(九天)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떠도는 혼'을 부르며 베트남 전쟁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한편, 미군에 의한 미라이 학살(베트남에서는 손미(Son my) 학살)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미군은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미라이 학살은 이듬해(1969)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찍은 학살 사진이 <라이프>(Life)지를 통해 공개되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폭로됐다. 미군이 1대대 주요 지휘관과 사병, 상급부대 지휘관들을 조사한 결과 상급 부대에서부터 이미 마을을 초토화하라는 명령이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체포된 장교 14명 가운데 형사 처벌을 받은 건 현장 지휘관이었던 1소대장 윌리엄 켈리(William Calley) 소위뿐이었다. 상급 부대의 명령이 명확한 학살 명령임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윌리엄 켈리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71년 닉슨 대통령은 그를 가택연금으로 감형했고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학살의 책임을 지고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 셈이었다.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남의 일이 아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도 적지 않았다. 1999년 한국은 민간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베트남과 공동으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를 공동 설립해 조사에 들어갔고 미국 정부에 전달된 100여종의 보고서와 20장의 사진을 통해 총 3건의 진실을 찾아내었다.

한국군은 1964년 9월22일을 기점으로 약 11년에 걸쳐, 그 중에서도 1965~1972년에 총 31만 2853명이 파병됐다. 1969년에 이르러 약 5만명의 한국군 병사가 베트남에서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민간인 노동자와 기술자도 1만5000명이 파견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의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전사자는 4687명이고 적 전사자는 4만1400명이다. 이중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약 80여건 희생자는 9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2018년 현재,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은 없다. 국민을 대신하여 국가원수의 사과와 유감 표명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국빈 방문 중 베트남 국민에게 우회적으로 사과했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호치민 묘지를 참배하고 헌화했다. 같은 해 시민사회에서는 모금활동을 벌여 베트남 퐁티에 희생자를 위로하는 위령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2013년 9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각각 베트남 국빈 방문 중에 호치민 묘소에 참배하고 헌화했다. 그러나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트남에 대한 사과와 관련해 참전 전우회 등 참전 유공단체와 유공자 등의 반발이 여전히 거센 상황에서 국민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 공식 사과와 함께 진상 조사 및 배상의 절차를 진행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도 일본정부에게 일제 강점기하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와 보상 문제'에서 자유롭고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이 '인류 도덕성을 시험한 전쟁'이란 오명을 붙여준 베트남 전쟁(1964~1975) 당시 150만명이 넘는 민간 사망자 수는 전체 전사자 수의 80%를 넘는다.

폭력적으로 죽어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자! 전쟁도 유기체(有機體)이다. 생성, 성장, 소멸의 단계를 거친다. 베트남 전쟁은 가시적으로는 1975년 4월 30일에 종전(소멸)했지만, 비가시적으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성장 중)이다. 이제 그 고통을 끝내야 함은 세계사적으로 양화가 악화를 소멸시키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화합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헌익 교수는 지난 1998년 12월 다낭에 있는 '의례전문가의 집에서 나눈 대화기록'에서 "죽은 사람들은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실제로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경험을 했는지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지난 1월7일부터 14일까지 '한베평화재단'에서 주최한 '베트남 고백(Go Back) 여행'으로 다녀온 평화순례기를 4회에 걸쳐 인천일보에 연재하게 됐다. 금번 순례기에 대한 많은 정보는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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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와 권헌익 교수의 자료에 큰 도움을 받았음을 밝히고 싶다. 나는 이들 '두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탄 난장이' 입장에서 소회를 적은 것 뿐이다. 많은 관심과 격려해준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사유진 영화감독



▲떠도는 혼을 부르며(Van Chieu hon)

-베트남에서 의례용 주문(呪文)으로 광범위하게 낭송되는 시


참수되어 죽은 자들
많은 친구와 친척들이 있지만 고독하게 죽은 자들
관료들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
아무도 그 죽음을 알아주지 않은 자들
시험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죽은 학생들
관도 없고 수의도 없이 급하게 매장된 자들
폭풍우로 바다에서 죽은 자들
상인들
너무 많은 대나무 기둥을 옮겨서
어깨가 굳어 죽은 자들
감옥에서 죽은 무고한 영혼들
( … )
덤불 속, 개울 속, 그늘진 곳에, 다리 아래, 탑 밖에, 시장에, 빈 논에, 모래 언덕에 있는 모든 혼령들
당신들은 추위와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당신들은 함께 이동합니다. 젊은이가 노인을 안고
당신들에게 이 쌀죽과 과실즙을 바칩니다.
두려워 마세요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이여, 앉아서 동참하시오.
보잘것없지만 우리의 선의가 담긴 이 선물을 물리치지 말고 받아주시오.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저자=응우옌 주(Nguyen Du·18세기 베트남의 관료이자 학자)


▲미호이를 찾아 오세요(come and visit my hoi)

-미호이(미라이의 작은 마을) 주민들이 부르는 노래


어느 범죄 이야기를 들어보자.
밤안개가 아직 수풀을 비추고 있을 때.
새들은 노래하고, 어미 닭은 병아리들을 부른다.
부지런한 아이들은 이미 놀이를 시작했다.
농부들은 물소를 쫓아 지평선으로 달려간다.
나이 든 여자와 남자들, 아이들.
누가 흙을 파서 먹고 사나-
누가 그들을 죽이려고 하나?
나라는 그걸 알기나 할까?
이제 막 미국의 범죄에 관해 들었다.
어떤 이들은 부모를 잃었다.
아떤 이들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니, 가족 전체에서, 애도의 흰 띠를 걸칠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원/통/한/죽/음/
당신들은 얼마나 많이 죽었냐고 묻지만,
나는 모른다.
당신들은 계속 숫자를 묻는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나는 모른다.
얼마나 많은 향을 피워야 하는지
나는 세보지 않았다.
뚜꿍의 미호이를 보러가자.
인민들이여! 미호이의 피를 기억하라.
학살의 손을 멈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