떵떵거리던 중국인 대부호 왜 우리땅에 묻혔나
▲ 견미조선보빙사 시설 우리탕(앞줄 맨 오른쪽)
▲ 우리탕 현재 묘
▲ 우리탕 아내 아말리아 묘
▲ 우리탕 저택.
中 창저우 출신 … '인천해관 창립 멤버' 활약

인천항 한 눈에 보이는 대저택 '오례당' 거주

유산·부동산 투자·고리대금 통해 재산 축적

스페인 아내 아말리아와 외국인묘지서 안식

인천가족공원 외국인 묘지(36번 묘)에 묻혀 있는 유일한 중국인, 우리탕(吳禮堂, 1843~1912)은 개항기 인천의 거부였다. 그는 인천항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응봉산 자락 송학동에 들어선 서양식 대저택 '오례당' 주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색 벽돌 위에 검은색 둥근 돔 형태의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인천의 랜드마크 건축물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 장수성 창저우 출신인 그는 프랑스 유학 이후 유럽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인천 해관 창립멤버로 1883년 인천에 왔다. 그해 7월에는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통역관 자격으로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과 함께 미국에 갔다왔다. 그는 1890년 인천해관을 사직하고 인천에 정착하다 스페인 출신 부인과 함께 인천가족공원 외국인 묘지에서 안식 중이다.

국인 묘지에 묻힌 중국인
인천 외국인 묘지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묻혀있다. 이름과 국적을 알 수 있는 50명은 대부분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서양인이다. 1883년 개항 이후 저마다의 이유로 배를 타고 인천을 찾았던 사람들 가운데 질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이다. 당시 인천에 들어온 외국인은 일본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중국인이 많았는데 이들은 각자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인천가족공원의 외국인 묘지에 일본·중국인 무덤이 없는 이유다. 그런데 외국인 묘지에 유일하게 중국인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 바로 우리탕(Woo Li Tang), 우리 발음으로 오례당이다. 30년 동안 인천에서 살면서 1000억대 재산을 축적한 대부호였다. 중국인이지만 그의 비석은 한자가 아닌 영어로 새겨져 있는 점도 독특하다. 우리탕이 중국인 묘지가 아니라 이곳에 묻혀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학동 붉은 벽돌집 주인
"높은 축대 위에 앞이 툭 터져 항구를 껴안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매우 안정감을 준다. 쓸모가 있으며 재치 있게 마련된 베란다가 정답고, 바다를 향해서 널찍널찍하게 뚫린 유리창이 몹시 시원스럽다."(최성연, '개항과 양관 역정')
지금은 사라졌지만 1960년대까지 중구 송학동, 현재 인성초등학교 정문 근처, 동국빌리지 자리에는 오례당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서양식 주택이 있었다. 붉은색 벽돌위에 검은색 둥근 돔 형태의 지붕을 올린 인상적인 집이었다. 외관에 걸맞게 크기 또한 연면적 1336㎡, 약 400평에 달했던 이 대저택은 인천항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풍광 좋은 곳에 자리해 그야말로 멋들어진 모습을 자랑했다. 인천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였던 오례당은 우리탕의 집이었다. 이 집이 오례당이라 불린 것은 주인 이름에 집 '당(堂)' 자가 있어 이를 그대로 붙였기 때문이라 한다. 오례당 집은 1909년에 건축됐으나 얼마 되지 않아 불이 나 소실됐다가 다시 지었다. 우리탕은 1912년 6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 집에서 생활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이 집은 부인이 일본인에 매각했고, 광복 이후 미군 장교 숙소와 국군 방첩대로 사용하다가 1968년 화재로 사라졌다. 집을 지을 때도 화마를 입더니 결국 화재로 건물이 사라진 것을 보면 우리탕은 불과 악연이 있는 것 같다.
인천의 대표적 양관을 소유했던 우리탕은 인천에 왔던 여느 중국인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1843년 중국 상하이에 인접한 장쑤성(江蘇省) 창저우(常州)에서 출생한 우리탕은 프랑스 후원자의 도움으로 일찍이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영어·스페인어 등 서양의 언어는 물론 서양의 문화에도 능통하게 된다. 이러한 능력으로 중국과 유럽에서 외교 통역과 수행원으로 활동했다. 1880년 쯤 스페인 주재 청국 공사관에 근무할 당시 스페인 여성과 결혼했다. 오랜 외교관 생활로 서양 문화에 익숙한데다가 부인도 서양인을 둔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이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천해관 창립 멤버
오랜 유럽 생활을 했던 우리탕은 인천 해관(海關) 창립멤버로 고용되면서 1883년 인천 땅을 밟았다. 해관은 세관의 중국식 이름인데, 창설 당시 세관을 중국의 제도를 본 따 만들었기 때문에 명칭도 중국의 것을 따랐다. 개항 이후 조선에는 일본과 청국, 서구의 무역상들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이들에 의해 쌀과 홍삼 등 조선의 특산물이 수출되고 면직물, 석유, 공산품 등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수출입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이를 수행할 행정기구가 필요한데 당시 조선에는 이러한 제도가 없었다. 조선은 청국에 근대적인 통상 외교를 담당할 인물을 요청했는데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추천됐다. 그에 의해 1883년 6월 인천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관이 설치됐다. 우리탕은 당시 뮐렌도르프의 초청으로 해관 창립 멤버로 고용됐다. 언어 능력과 국제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관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탕은 1883년 7월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사신)의 통역관으로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과 함께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10여년 이상 인천해관에 근무하다가 1900년 쯤 은퇴하고 제물포에 정착했다.
천의 대부호
우리탕은 오랫동안 통역과 외교 수행원을 지냈지만 평범한 직업인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오랜 후원자가 유산을 물려주면서 많은 재산을 얻은 데다가 부동산 투자와 고리대금 등으로 큰 부를 쌓았다. 1887년 청국은 조계 확충을 위해 조선 정부와 교섭을 통해 내동과 경동, 신포동 일대 삼리채(三里寨)를 제2의 조계로 확보했다. 삼리채 조계는 약 3800여평의 면적인데 이 중 우리탕의 토지가 13개 필지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할 정도로 그의 재력은 대단했다. 송학동 언덕에 대저택을 지은 것도 이러한 경제력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재력가였지만 인천에서 그의 삶은 그리 편치 않았던 것 같다. 부인은 영악하고 인정이 없어 인천의 외국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전하며, 저택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한 뒤에는 재산을 놓고 중국에 있던 조카와 부인이 오랜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외국인 묘지에 있는 우리탕 무덤 묘비는 그의 아내와 딸, 조카가 세웠다. 스페인에서 결혼한 우리탕의 부인 아말리아 아마도르 우(Amalia Amador C. Woo, 1863~1939)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27년 뒤 남편 옆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명 씌어진 'Rest in Peace'라는 문구처럼 외국인묘지에서 부부가 평화롭게 안식 중이다.
우리탕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고 인천에서도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알려진 바 없으나 우리탕 부부가 답동성당에 종을 기부한데다가 부인이 스페인 출신인 것을 보면 천주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리탕은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삶과 종교는 서양인에 가까웠다. 머나먼 타국에서 숨을 거둔 뒤에도 동포들과 함께 하지 않고 서양인 묘지에 묻힌 것도 우리탕의 인생 궤적을 살펴보면 수긍할 수 있을 듯 하다.
/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보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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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탕의 유언과 삼리채 소송사건


부인·조카 상속재산 분쟁 끝에 반반 나눠

삼리채땅 다툼 … 조선인 이주비 받고 떠나

"내가 죽고 나면 이 집안의 부동산 및 현금은 물론 이후 모든 재산의 매출과 매입 또한 내자가 전권을 쥐고 관리한다. 그리고 내자가 죽으면 그 가산은 모두 내 후계자가 승계한다."
우리탕은 유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례당 유촉서'(1912년 1월29일)에서 자신의 사후 재산 관리에 대한 내용을 남겼다. 그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양자와 양녀를 뒀으며, 조카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이후 부인과 조카가 1000억원대에 이르는 상속재산을 놓고 1년에 걸친 분쟁 끝에 반반씩 나눴다.
제2청국 조계지로 조성한 삼리채에 많은 땅을 소유한 우리탕은 1891년 삼리채 중국조계 자신의 소유 땅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894년 조선인을 모두 내쫓았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인이 떠난 삼리채에 다시 조선인 민가가 들어서 1897년 정동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대략 50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국인 지주들이 토지를 되찾으려고 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우리탕을 비롯한 중국인들이 가옥 철거와 이주를 요구하는 집단 민원을 제기, 1899년 조선인들은 이주비를 받는 조건으로 삼리채를 떠났다. 조선인과 중국인이 삼리채 땅을 놓고 벌인 이 다툼은 한국정부와 열강까지 개입해 9년만에 해결한 사건이었다.
그가 중국인 묘지가 아닌 외국인 묘지에 묻힌 것과 관련,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오례당 본인이 원해서 외국인 묘지 묻혔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발견된 유서에는 관련 내용이 없어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스페인 출신 아내의 뜻이 강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으며, 가톨릭 신자로서 중국 전통의 민간제례에 의한 중국인 매장방식을 거부했을 수도 있다고 하겠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