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두 얼굴 … '진센'은 화려했고 '인천'은 암울했다
▲ 일본이 대표적 식민통치 정당화 도구로 사용한 월미도 제방도로.
▲ 축항 기공식.
▲ 조일양조장·풍전양조장 술통.
▲ 역무물산주식회사 등 정미소 쌀포대.
▲ 월미도 조탕 간판.
▲ 인천부 종이문서들.
日, 감리서·조계제도 폐지
인천항 '갑문' 대대적 홍보
월미유원지·해수욕장 준공
식민통치 정당화 위한 번영
조선인은 열악한 노동 계속



러일전쟁 이후 1906~1914년까지 일본은 감리서를 폐지하고 이사청을 신설해 외국인 출입 사무까지 관장하며 식민지 정책의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때 일본인들은 신흥동과 도원동까지 진출해서, 자신들이 거주한 바깥의 조선인 마을을 '한인 부락(部落)'이라고 비하했다.

이같은 과도기를 거쳐 일본은 1914~1936년까지 본격적인 식민통치에 들어간다.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개항 이후 30년 동안 이어진 조계제도를 폐지하면서 다문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인천은 왜색의 도시, 진센으로 변화했다.

인천항은 쌀의 수출항으로 기능해 정미공장과 양조공장 등의 산업시설이 들어선다. 인천항의 이중갑문식 선거와 월미도 유원지, 산업시설 등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선전수단으로 이용됐다. 당시 인천인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차별대우 등에 저항하며 화려한 번영의 상징이자 암울한 식민도시인 진센에 살았다.


▲감리서 폐지와 인천이사청(仁川理事廳) 설치의 과도기(1906-1914)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해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1906년 2월 개항장 등에 뒀던 일본영사관을 대신할 이사청을 신설하고, 감리가 관장하던 외국인 출입 사무를 이사청으로 이관시켰다.

그 해 9월 대한제국 정부는 인천을 비롯한 개항장과 개시장(항구가 아닌 내륙지역 또는 국경지역에 설치한 외국인의 상업활동 및 거류지역)의 감리서를 폐지했고, 감리는 부윤이 돼 그 지방의 행정 업무만을 관장했다.

인천부윤은 1903년 지방제도 개편 때 구획된 부내(府內), 다소(多所), 주안(朱安), 구읍(舊邑), 서(西), 남촌(南村), 조동(鳥洞), 신현(新峴), 전반(田反), 황등천(黃等川), 영종(永宗), 덕적(德積) 등 12개 면의 행정을 관할했고, 이러한 행정체제는 한일병합 후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유지됐다.

▲부내면과 한인 부락

1903년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인천군 다소면에서 일부(지금 중구와 동구 일부)를 떼어내어 부내면으로 편제하고, 문학동 일대를 가리키던 기존의 부내면은 구읍면으로 바꿔 불렀다. 러일전쟁 이후 신흥동과 도원동 일대까지 진출했던 일본인은 자신들 주거지 바깥의 조선인 마을을 비하해 '한인 부락(部落)'이라 불렀다.

▲인천이사청의 정명(町名) 개정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조계의 일본인들은 그들의 행정지명인 정명(町名)을 사용하고 있었다. 거주민이 늘어나면서 정명 또한 점차 세분화 됐고, 1907년 인천이사청에서는 부내면 일대의 지명을 모두 일본식으로 개정했다. 한편, 인천부는 조선인 마을의 우리식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한국과 일본의 이중적인 지명이 붙게 됐다. 이로 인한 혼란은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계속됐다.

▲진센과 인천, 도시의 양면(1914-1936)

한일병합 후 일본은 내정간섭을 일삼았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확대 개편하고 본격적인 식민통치에 들어갔다. 개항장의 출입국 사무와 질서유지만을 담당했던 인천이사청을 지방행정의 모든 분야를 관장하는 인천부로 개편하고, 우리 측 지방관아인 인천부를 폐지했다.

인천부는 마을의 행정 단위까지 정비해 일본인 거주 지역에는 '정(町)'이라는 일본식 지명을, 조선인 거주 지역은 '리(里)'로 구획된 우리식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인천은 일본어 발음 그대로 진센(Jinsen)이 돼 일본의 식민도시로 변모해 갔고, 일본은 인천을 화려한 근대도시로 치장해 조선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반면, 치장된 식민도시 진센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순응하면서도 일본인과 차별되는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며 민족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부제(府制) 실시와 조계의 폐지

을사늑약 이후 한국의 관청인 인천부와 일본의 인천이사청이 공존하며 유지되던 이중적 행정체제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러한 과도기를 거쳐 조선총독부는 1914년 4월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지방 행정구역을 12부 220군으로 개편해 도시를 부(府), 촌락은 군(郡)으로 구분지었다.

그에 따라 인천부는 부내면 전역과 다소면의 송림리, 송현리, 화도리, 수문통, 수유리 등 지금의 중구, 동구 지역에 한정됐고, 나머지 인천 지역과 부평부를 통합해 부천군을 신설했다. 이와 함께 개항장에 유지되고 있던 조계제도를 폐지했다. 개항 이후 30년 가까이 존속됐던 조계제도가 폐지되면서 다문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인천은 왜색 가득한 도시, 진센으로 변해갔다.

▲식민도시의 산업

한일병합을 전후해서 인천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경성이라는 큰 시장과 이웃해 있고, 항구와 철도역이 위치하는 지리적 이점은 일본인 자본가를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일본 자본은 인천에 정미공장과 양조공장을 비롯해서 성냥, 비누, 간장 등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크고 작은 공장을 건설했고, 인천은 점차 산업도시로 변모해갔다. 몇몇 조선인 자본가가 운영했던 정미소, 양조장 등도 존재했지만, 일본인의 그것에 비하면 규모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쌀의 도시, 인천

인천항은 한일병합 이전부터 경기도 일대에서 생산되는 미곡의 수출항으로 기능해 왔다. 그런 탓에 곡물 선물시장인 미두취인소가 설치됐고, 일찍부터 곡물을 위탁 판매하는 미곡상이 모여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설립한 대형 정미공장도 속속 들어섰다. 인천항에 집산되는 쌀을 도정해 백미로 수출하기 위한 공장들이었다. 정미공장과 함께 쌀을 원료로 했던 양조공장도 인천 곳곳에 들어섰다.

▲도시의 번영, 도시민의 삶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설치된 전기, 수도, 항만 등의 기반시설,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해 세워진 대규모 산업시설 등은 인천을 화려한 근대도시로 치장하는 선전 도구가 됐다. 일본은 이러한 인천의 번영을 식민통치의 치적으로 삼아 조선인은 물론 국제적으로 널리 선전하고자 했다.

1915년 한일병합 5주년을 기념해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의 별관으로 인천 수족관을 개관했으며, 일본 학생들이 꼭 가봐야 할 수학여행지로 인천을 추천하기도 했다. 도시의 발전은 윤택한 도시민의 삶으로 이어져 극장, 해수욕장, 유원지 등 인천부민을 위한 위락시설도 들어섰다. 그러나 도시 번영의 혜택은 대부분 일본인들에게 돌아갔으며, 인천부민 중 다수를 차지하던 조선인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인천항의 이중 갑문식 선거(船渠)

조선총독부는 인천항의 최대 약점인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1911년 6월 이중 갑문식 선거 건설공사에 들어가 1918년 10월 1차 준공을 보고, 1923년 모든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중 갑문식 선거는 배가 정박하는 선거의 수심을 8~10m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선거와 바다 사이에 두 개의 갑문을 설치해 갑문 사이의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조수와 관계없이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만시설이었다. 선거 내에는 4500t 급 선박 세 척과 2000t 급 선박 다섯 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고, 부두에서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철로를 부설해 하역과 동시에 육상 운송을 가능하게 했다.

일본은 이를 '동양 유일의 이중 갑문식 선거'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일본에 있어 이중 갑문식 선거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자, 그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선전 도구였다.

▲월미도 유원지

이중 갑문식 선거와 함께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 월미도 유원지다. 인천부는 1918년부터 월미도 개발을 시작해 순환도로를 건설하고 이듬해에는 월미도 동남쪽 해안에 공설 해수욕장을 개설했다.

1922년 4월 인천부는 섬이었던 월미도를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서 인천역에서 월미도까지 약 1km의 석축제방, 돌제(突堤)를 준공했다. 그해 여름 월미도 북단 2500여평의 부지에 조탕(潮湯)과 풀장 등을 갖춘 월미도 유원지를 건설했다. 해마다 1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았던 월미도는 인천뿐 아니라 수도권을 대표하는 유원지로 유명세를 떨쳤다.

▲진센에 살았던 인천인

한일병합 후 각종 산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인천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특히 일자리를 찾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조선인 노동자가 급증했는데 그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턱없이 낮았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일본인 경영자의 부당한 차별 대우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이 정미공장의 여공들로부터 시작돼 각 공장으로 번져갔다.

한편, 일본인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위해 야학과 강습소가 곳곳에 설립됐으며, 기차로 서울까지 통학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경인열차통학생회가 조직돼 운동, 문학, 계몽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화려한 번영의 상징이자 암울한 식민도시 진센에 살았던 인천인의 모습이었다.

/글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인천도시역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