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 상처 여전·日 사과 기대 … 오늘 잔치
▲ 지난 3월 독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에 참석한 안점순 할머니의 모습. /사진제공=수원평화나비

"눈물이 안 말랐기에 지금도 이렇게 눈물이 나지."

13일 구순 잔치를 앞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자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 33명 중 한 명인 안점순 할머니는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안 할머니는 늙어지는 것이 슬픈게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 삶이 슬펐다. 안 할머니가 구순을 맞도록 일본정부는 여전히 진정성 있는 공식 사죄 등을 하지 않고 있다.

안 할머니는 192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4살이 되던 해인 1941년 서울 마포구 복사골에서 연행됐다. 안 할머니는 동네에서 여성들만 나오라는 방송을 듣고 나왔다가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렸다. 일본군에 끌려갈때도 안 할머니는 위안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족들과 생이별한 안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중국 북경과 천진 등 내몽고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고향에서 이역만리나 떨어진 낯선 곳에서 당시 소녀였던 안 할머니는 생존을 위해 일본군성노예 생활을 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해방을 맞이했지만, 북경에 체류하면서 이듬해 4월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국 천진에서 배를 나눠 타고, 인천항을 통해 해방 후 8개월 만에 귀국했다. 피해자 증언에서 안 할머니는 집에 돌아온 뒤 석 달을 앓아누웠다고 표현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했고, 가족들과 피난을 떠난 대구에서 낙동강전투로 주둔해 있던 미군의 빨랫감을 얻어다 일하며 지냈다. 전쟁이 끝나고 군인들이 돌아가면서 안 할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집 안에 있던 집기들을 팔아 조그만 구멍가게를 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수모와 고초를 당한 후유증으로 결혼을 포기했고, 평생을 홀몸으로 살았다.


안 할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대구를 떠나 1992년 수원으로 이사했다. 조카내외와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25년 동안 수원과 연을 맺고 있다.

안 할머니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1991년 8월) 이후인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으로 등록했다.

외부와 접촉을 끊고 칩거하던 안 할머니는 2014년 5월 수원시민 성금으로 수원올림픽공원 내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수원평화나비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지난 11월에는 용기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정의기억재단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주최한 '100만 시민이 함께 하는 여성인권상 시상식'에서 '여성인권상'을 수상했다. 지난 3월에는 수원시민의 성금을 모아 독일 비젠트 시에 건립한 '독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42명의 시민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또 피해당사자를 배제하고 이뤄진 '2015 한일합의'에 대해서는 무효와 재협상을 주장하며, 일본정부의 출연금으로 세운 '화해와 치유재단'의 위로금을 끝까지 거부했다.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으로 살아온 안점순 할머니는 구순연을 앞뒀지만 그 고통과 치욕을 풀어내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하루빨리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의 공식사과를 이끌어내길 기대하며 그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수원 올림픽공원을 걸었다.

수원평화나비 관계자는 "13일 오후 수원 팔달구 웨딩팰리스에서 안점순 할머니의 구순잔치를 열 계획"이라며 "올해 (안 할머니) 구순연은 그 어느때보다 소중한 시간으로 채워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상아 기자 asa88@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