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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왜 해양도시인가] 9. 천일염의 원조 '주안염전' -끝

환경·유통까지 완벽한 조건 '백색황금'을 낳다
개항 후 소금 수요 급증하자
1907년 최초 주안염전 축조
남동·소래 등 잇따라 문 열어
전성기 생산량 15만t…전국 절반
경인선 타고 일본·만주 수출도

2017년 11월 23일 00:05 목요일
▲ 1907년 우리나라 최초 천일염을 생산하는 주안염전이 문을 열었다. 이후 1933년쯤에는 인천의 염전은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은 염부사진엽서.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1907년 조성된 인천주안염전. /사진제공=인천시화도진도서관

오늘날 인천의 바다는 개항 이전의 그 많던 갯벌과 포구, 섬들이 사라진 바다다. 개항 이후 만과 곶으로 이뤄진 굴곡이 심한 해안선은 간척과 매립, 제방공사로 직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항만과 산업, 군사시설 등에 자리를 내줬다. 특히 인천의 갯벌은 일제 강점기에 염전으로 개발됐다가 이후 공업용지로 변했다.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인천은 110년전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이 세워진 곳이다. 1907년 주안염전을 시작으로 남동염전과 군자염전, 소래염전 등이 잇따라 축조되면서 인천의 염전은 전국적인 명성을 날렸다. 이들 관영 천일염전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소금 과잉생산으로 정부의 폐염 유도 정책에 따라 1996년 소래염전을 마지막으로 모두 폐전됐다. 이렇게 인천은 우리나라 제염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장소적 의미를 갖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소금은 생활 필수품이었다. '백색황금'이라고 부를 만큼 곡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염업은 국가의 기간 산업이자 커다란 부를 가져다 주는 이권산업이었다. 소금은 암염과 지하함수, 해수 등에서 채취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소금은 해수를 끓여서 만든 자염(煮鹽)으로 화염, 전오염, 육염이라고도 했다. 생산방식에서 우리나라는 바닷물을 열로 가열, 증발시켜 소금을 얻는 고비용의 전오(煎熬) 염전방식인 반면, 중국은 땅에서 파내는 천연의 암염을 생산했기에 가격이 낮고 순도 또한 높았다.

중국산이 국산에 견주어 경쟁력 면에서 월등했다. 개항 이후 외국산 소금이 들어오면서 국내 소금생산 기반이 흔들렸다. 이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자급자족의 재래식 염전을 모두 천일염으로 바꿨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어업 및 가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염장하는 데 필요한 소금의 소비량이 증가했고, 소금에 절인 어물의 소비량도 증가했다. 해삼이나 정어리 등 수산물과 염우피(소금에 절인 소가죽) 등의 해외 수출도 증가하면서 소금의 수요는 급격히 많아지게 됐다.

늘어나는 소금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산 소금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1889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수입된 청국산 소금은 천일염으로 조선 소금의 반액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값싼 천일염에 대응해 관염으로 천일염을 생산하고 전매 체제로 통제해 엄청난 수입을 올리려고 했다.

이에 따라 지형과 기후, 토질 면에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경인철도와 항구를 통한 신속한 물자 수송이 가능했던 인천에 최초의 시험용 염전을 축조했다. 1907년 인천 주안면 십정리에서 한국 최초의 천일염을 생산하고, 1909년부터는 본격 생산에 들어간다.

주안염전은 지금의 서구 가좌동과 부평구 십정동 일대 지역을 말한다. 인천 일대의 염전은 1945년까지 4차례에 걸친 확장 축조공사 끝에 주안·남동·군자·소래염전 등 5925정보를 완성한다.

1921년 7월 담배와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 되고, 1933년쯤에는 인천의 염전은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인 15만t을 생산했다.

인천의 소금은 경인선과 수인선, 그리고 경부선·경의선 등으로 연계해 국내는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실려 나갔다. 그러나 광복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주안염전 일대는 크게 파괴된다.

주안 염전은 1968년 폐염되고, 그 자리에 1973년 한국수출공단 5단지, 일명 주안5공단이 준공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동염전도 1980년대 인천시의 도시개발사업에 밀려 산업단지로 조성되고, 1995년 수인선이 폐선되면서 1996년 소래염전마저 문을 닫았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특별기고_김상열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해불양수'의 도시 인천, 국립해양박물관 최적지


평소 필자에게 큰 가르침을 주시는 지역의 원로는 인천을 해불양수의 도시라고 말씀하신다. 해불양수(海不讓水). 바다는 어떠한 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토박이가 열에 하나에 불과한 인천은 이주민의 도시이다. 개항 이후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민족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선도했다.

이들과 함께 인천은 인구 300만명이 넘는 국내 3대 도시로 성장했다. 사람들을 인천으로 모은 이유는 바다였다. 바다를 중심으로 그 누구에게나 기회를 제공해 온 인천은 포용적이고 역동적인 도시이다.


▲수도권에는 해양 관련 박물관이 없다

해양과 관련한 박물관이 전국에 20개관이 운영되거나 건립 중에 있다. 각기 주제를 달리하는 국립해양박물관도 6개관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인천, 서울, 경기도 등 대한민국 인구의 반이 거주하는 수도권에는 해양을 주제로 하는 박물관이 전무하다. 수도권 시민들에게 우리의 해양문화와 역사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 해양문화를 접하지 못하면 해양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천은 개항 이후 수도권의 관문으로 역할을 해왔고, 이제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의 허브도시로 기능하고 있다. 수도권에서의 접근성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찾는 외국인에게 우리의 해양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인천은 국립해양박물관의 최적지라 하겠다.


▲바다를 중요시 했을 때 국가는 강건했다

우리 민족의 영토는 3면이 바다인 해양 국가이다. 바다를 장악한 국가가 삼국의 패권을 잡았고, 해상세력이 개창한 고려는 국제무역항으로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바다의 중요성을 잃어갔다. 심지어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을 펼치면서 점차 해양권력을 상실하였다.

근대국가가 등장하면서 해양권력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해양권력을 키운 근대국가들은 바다를 지키지 못한 나라를 침범해 왔다. 우리 민족의 시련은 해양권력을 지키지 못한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제 황해를 중심으로 해양권력을 키워나가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해양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인천에 건립될 국립해양박물관은 해양대국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다양한 해양 콘텐츠가 숨쉬는 도시

조수 간만의 차가 14m에 이르는 인천 앞바다는 선박의 입출항이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다. 선박의 운항을 위하여 근대식 항로표지를 1903년 국내 최초로 설치하였다. 소월미도등대, 팔미도등대, 백암등입표, 북장자서등입표가 바로 그것이다.

1876년 이래 여러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은 관세권을 보장하였다는 큰 의미가 있다. 관세권 보장은 우리 민족의 해양권력을 세계만방에 알린 것으로 근대국가로서 조선이 세계무대7에 등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해양권력의 상징을 수호하기 위해 관세행정을 담당하는 인천해관이 문을 열었다. 인천해관은 항만시설, 항로표지, 기상관측 등 인천이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제반시설을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해양주권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정은 양무함, 광제호 등의 군함을 보유하여 해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양무함의 초대함장은 인천사람 신순성이요 최초의 도선사 역시 인천사람 유항렬로 근대 해양인력도 인천에서 등장하였다. 해군양성을 위해 강화에 조선수사해방학당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광복 후에는 조선해양대학을 설립하여 해양인력 양성의 시대를 열었다.

이외에도 상회사와 민간해운회사들이 태동한 곳이고, 해양을 주제로 한 다양한 위락시설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많은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녹아있다.

인천일보의 '인천은 왜 해양도시인가'라는 연재에서 그 일면을 보았듯이 인천은 항만과 해사와 관련한 다양한 역사와 콘텐츠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은 지속적으로 해양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며, 다양한 해양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국가와 수도권의 발전을 위해 바다를 내어준 도시

재능대학교 손장원교수는 인천은 국가와 수도권의 발전을 위해 바다를 내어준 도시라고 말한다. 그래서 국립해양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으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출산업을 위한 경인공업단지 조성으로 북쪽 바다를, 염전개발을 위해 남쪽 바다를, 동북아시아 허브도시를 위해 서쪽 바다를 내어주었다. 원활한 수출을 위해 백만평이 넘는 내항을, 세계 1위 공항을 위해 섬 사이의 바다마저 내어준 도시이다. 이제 국립해양박물관이 인천에서 문을 여는 것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인천은 지방색이 없는 하얀 도화지와 같은 도시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색을 입혀 도화지를 채워온 인천의 지방색은 작은 대한민국이라 하겠다. 그 도화지 위에 국립해양박물관이 그려지도록 인천 시민은 물론 수도권 시민들도 애정어린 관심과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한 때이다.

박물관은 평생학습기관이다. 교육의 기능과 엔터테인먼트를 합쳐 에듀테인멘트를 지향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미래 세대들이 인천에 문은 연 국립인천해양박물관에서 즐겁게 배우면서 바다가 가진 포용력과 역동적인 진취성을 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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