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 남겨진 자식 생각 … 웃음에 묻어나는 고단함
▲ 풀각시 아마추어 기타팀의 연주에 맞춰 사할린 동포 할머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지금부터 10년 전인 2007년 10월.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한 동포 580여 명이 인천 남동구에 자리를 잡았다. 6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일제 강점기 때 떠난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17평에서 20평 남짓한 임대아파트에 두 명이 짝을 이뤄 짐을 풀었다. 처음 귀국해서는 주변에 의지할 만한 양로원 하나 제대로 없었다. 동네 비좁은 경로당에서 7년이나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2014년이 되고서야 지금의 번듯한 휴게시설을 갖게 됐다. 많지는 않지만 주변의 온정도 이어졌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자식들과 헤어져 외로운 노년을 보내야 하는 일이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자녀들과 동반 이주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역사의 굴곡 속에서 수차례 되풀이된 이산의 아픔이 지금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방문객들을 웃음으로 맞이하는 사할린 동포들의 숨겨진 아픔을 들여다본다.

● 사할린 동포를 찾는 위로의 손길들

지난 12일 오후 2시께 남동구 논현동 사할린 센터는 웃음과 활기로 넘쳐났다. 주위 고등학생들이 위문 공연을 오는 날이었다.
송천고등학교와 인천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이 춤과 노래잔치를 벌인다고 했다. 아마추어 기타 동호회와 민요가수도 동참했다.

공연 시작과 함께 송천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첫 번째로 무대에 올랐다.어른들이 즐겨 부르는 "내 나이가 어때서"에 맞춰 신나게 춤을 췄다.

인천예고 학생들은 차분한 목소리로 가곡을 선보였다. 예술고등학교 학생들답게 빼어난 노래 솜씨를 자랑한 무대였다. 사할린 동포를 위한 러시아 민요 '카츄샤'도 준비했다. 카츄샤를 부르는 동안에는 모두가 흥에 겨워 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학생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께 작은 선물을 나눠 드리는 기특함도 잊지 않았다.

풀각시 기타동아리는 '안동역에서' 등 익숙한 노래들을 연주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돌아간 자리에는 타국에 자식들을 남겨두고 온 노인들만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

● 고난의 사할린 역사

동토의 땅 러시아 사할린은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제가 이곳을 점령한 뒤 참혹한 강제징용을 시작했다. 조선 남쪽에 살던 촌부들은 총칼로 위협하는 일제에 의해 끌려왔다. 이들은 탄광과 벌목장에서 무자비한 강제 노역에 내몰렸다. 이 과정에서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은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사할린 강제 징용자들은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일본 귀국선이 들어온다는 코르사코프 항구로 4만 명의 조선인들이 몰려갔다.

하지만 일본은 제 나라 사람들만 데려갔다.
해방된 남과 북은 저 사는데 급급해 이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국으로 갈 배를 손꼽아 기다리던 조선인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어 나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십 년간 고향을 그리며 하염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지금도 코르사코프 항구 언덕에는 조선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 물꼬를 튼 영주 귀국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1990년 한국과 러시아의 국교가 정상화됐다. 이를 계기로 1992년 9월 사할린 잔류 독거노인 72명이 첫 번째 영구 귀국을 했다. 이후 매년 1백여 명씩 모두 4368여 명이 영구 귀국길에 올랐다.
지난 2015년 말 기준으로 3035명이 국내 24개 지역에 정착해 있다. 인천 남동구 논현동에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436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밖에 연수구 연수3동 92명, 부평구 삼산동 42명, 서구 가정동 33명 등이 거주 중이다.
남동구 논현동에 거주하는 이들에게는 작은 임대 아파트가 제공된다. 그것도 두 명이 한조를 이뤄 살아야 한다. 임대 아파트 구조가 2인 1가구로 되어 있다는 이유에서다. 집을 사람에 맞춘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집에 맞추라고 요구한 것이다. 부부는 문제가 없지만, 혼자인 노인은 모르는 사람과 한 집에서 지내야 한다. 이 때문에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는 영세민에게 지급되는 매월 50만 원 가량의 생계보조비가 지급된다. 여기에 소액의 수당과 러시아에서 지급되는 연금으로 넉넉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 이산의 아픔을 외면하는 정부 정책

사할린 동포들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 세 번째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일본과 한국이 영구 귀국을 추진하면서 귀국 대상을 한정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에서 태어났거나, 이주해서 살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초 영구귀국 업무처리지침은 직계가족이 함께 귀국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1995년 한·러·일 3국 업무 협의 과정에서 귀국 자격을 제한하는 일본 안을 우리 정부가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결국 한국으로 들어온 노인들은 자식들을 사할린에 떼어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의해 두 차례나 이산의 고통을 겪은 이들을 해방된 조국이 또다시 찢어 놓은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법안이 지난 2월 민주당 전해철 국회의원에 의해 제출됐다. 그런데 이 법안은 자식 중 한 명만을 선택해 함께 귀국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동사할린센터 신동식(82) 회장은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에 있느냐"고 탄식한다. 신 회장은 "자식 중 하나만 골라서 데리고 오라는 요구는 가족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처사"라며 침통해 했다.

지구촌 동포연대 최상구 사무국장은 "사할린 동포를 대하는 정부의 정책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사할린 동포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관련 법률을 현실에 맞게 서둘러 제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사진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