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식 집착하기보다 창조적 실험 계속"
'쓰고(書)' '새겼다(刻)'. 딱 50년 동안 절차탁마했다. 평생을 전업작가와 후배양성의 길을 걸었다. 20대부터 작가로 활동하며, 35세에 최연소 국전 초대작가를 거쳐 서예와 전각(篆刻) 작가로서 일가를 이룬다. 대한민국 서단에 굵은 획을 그은 청람(靑藍) 전도진(田道鎭 1948~). 그는 내년에 50년 전각 작품활동을 되돌아보는 대대적인 전각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1년 동안 전시회를 준비할 계획이다. 칼과 인주, 돌 등 시시콜콜한 전각 도구에서부터 작품까지 50년 전각 작품활동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서단 두 거목의 적통자

청람은 한국 서단 두 거목에게 글씨와 전각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적통자다. 인천출신 동정 박세림에게 1966년에 글씨를, 동양에서 손꼽히는 전각가 석봉 고봉주한데는 1968년에 전각을 사사받았다. 해서와 전서, 석고문, 소전, 대전, 금문을 설렵한 그는 전통의 고아한 멋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적 감각과 조화를 이루려는 자기필법의 길을 걷는다.

"한지라든지 자연재료인 돌, 나무, 흙, 스티로폼, 기왓장 등을 전각기법이나 부조기법 등으로 응용해서 이를 새겨 찍어내거나 혹은 두드려서 나타내는 작업을 주로 해 왔지. 이는 서예와 전각의 한계를 넓히려는거지. 채색도 먹, 안료, 심지어 황토 흙까지 작품의 뜻과 공명하는 모든 방식을 동원하려고 애썼지."

청람은 전통필법이라는 고정관념과 격식에 집착하기 않고 다양한 창조적 실험을 계속한다. 서예나 전각을 할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거나 새긴다. 체제의 역행이나 전통서법의 전복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한글세대에 맞는 서법이라고 강조한다. 전각에서도 방촌공간(方寸空間)의 여백미를 활용하기 위해 성명인에서 '인(印)'자를 생략해 버리기도 한다. 그의 실험정신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서예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광(光)' 대신 화투패 '똥광'을 그려넣고 '똥입니다'라고 낙관을 쓴 파격을 선보였다. 지식인의 향유예술로 치부하던 서예작품을 순식간에 민중의 풍자놀이로 바꿔놓은 통쾌한 도발이었다. 고전이나 시구뿐만 아니라 유행가 가사까지도 선구해서 작품속에 녹여낸다. 순간,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대중과 소통한 것이다.

#동정의 청출어람 제자

그는 대가 두명을 스승으로 섬기고 가르침을 받았다.

첫번째 스승은 한국 서예계의 거봉 동정(東庭) 박세림(1925~1975)이다. 동정은 강화에서 태어난 인천사람이다. 인천에서 반세기 동안 제자들을 길러내고 작품활동을 벌인 서예계의 어른이었다.

청람은 고등학교 때인 1966년 당시 인천 내동에 있는 최초의 서실이었던 동정서숙(東庭書塾)에서 동정을 만나면서 붓과 인연을 맺고 서예에 입문한다. 지성이면 감천을 넘어 지성통신(至誠通神)의 결의를 다지고 학서(學書)에 정진한다. 스승은 애제자에게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의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줄인 말, '청람(靑藍)'이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그는 서력을 연마하는 50년 동안 '청람'을 작가 인생의 화두로 삼았다. 그리고 오늘날 청람은 서(書)와 각(刻)을 통합한 독자적인 경지의 작품세계를 일군다.

#사람이고 글씨고 속되면 안 디여

또 다른 스승은 석봉(石峯) 고봉주(1906~1993)이다. 청람은 1968년 석봉의 1호 제자로 입문한다. 동정에게는 글씨를, 석봉한데는 전각을 배웠기에 일찍부터 전각계에 두각을 나타낸다. 말없는 돌 위에 마음을 새기는 전각은 예술성을 지닌 도장을 말한다.

"석봉 선생님의 두 가지 가르침이 기억난다. 하나는 '여등산(如登山)'이다. 쉼없는 정진의 길을 보여 줬다. 또 하나는 '속기(俗氣)'라는 말을 통해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券氣)'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 줬다."
그는 인천 선린동 화교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중국의 법첩과 인보를 접하고, 몽당붓으로 쓰고 문방구용 칼로 새길만큼 일찍부터 인장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작가에 입문해서 조그만 돌위에 마음을 비우고 우주를 새겨왔다

"'속되면 안 디여', '사람이구 글씨구 말이여'" 그는 석봉 스승이 귀에 딱지가 얹도록 해주던 그 말 한마디를 50년 동안 가슴에 품고 글씨에 매달렸다.
"지금까지 새긴 전각 작품이 수 만여점이다. 자용인(自用印)이 3000방, 인장도 300개, 서각도 100개, 인주 60종류 정도인데, 글씨와 어울리는 작품에 사용하려고 하면 그것도 부족해."

석봉은 중국의 전각가 오창석(1844~1927)의 제자인 일본의 '인성(印聖)'이라고 불리는 카와이센로의 고족제자이다. "오창석도 이 칼로 공부한 거여." 석봉은 카와이센로로부터 물려받은 전각도를 청람에게 내줄만큼 애제자로 여겼다.

반백년을 가슴팍에 각을 치며, 새로움과 공감, 공력을 창작정신의 우듬지에 두었건만, 여전히 덕지덕지 속된 것 뿐인듯 해서 자책만 남는 말. "청람! 아직도 안 디여. 아직도 속 디여!"

/글 사진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청람은

그는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 피난시절 내려와 지금까지 인천에 살고 있다. 동정의 문하에서 10여년 동안 글씨를 익힌 그는 1969년 국전에서 시작해 마지막 국전인 1981년까지 15번 출품해서 특선 3번, 입선 7번이라는 대기록을 남긴다. 1984년 최연소 초대작가로 일찍부터 서명을 알린다. 대한민국 중진서예가 10인에 뽑히기도 한 그는 대통령 인장을 새기는가하면 국새제작자문위원도 거쳤다. 어느새 고희를 맞이한 나이인 그는 서예와 전각의 적통을 이어받은 현존하는 마지막 1세대 원로 작가가 됐다.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를 퇴임한 그는 묵향이 흐르는 공간인 청람서예전각연구실(인천시 남동구 문화서로 4번길 19-1)에서 후배양성과 창작활동을 하면서 필생의 대작을 구상하고 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