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최근 고려대학교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학벌주의 옹호에 대한 반론이 제기돼 네티즌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이 글의 발단은 "내가 어떻게 고대에 왔는데…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좀 덜 대접받아도 되지 않나 싶다"라며 공무원시험, 기업채용에서도 명문대 출신이 우선 점유할 수 있도록 직업군과 연봉마저 대학 서열에 따라 배치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모든 인생에는 끝없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한 반론은 비록 게시자가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고, 독학으로 이룬 성과라 하더라도 "그나마 공부할 여건이 있었던 점에 감사하라"고 이어졌다. 장애를 안고 불평등에 고전하는 사람들도 있어 "인생은 야구처럼 쓰리아웃으로 망하면 안 된다"고 반박했다. 패자부활전이 사라져가는 사회풍토에서 80을 끌고 갈 20의 책무를 주장한 청년의 예지가 돋보였다.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는 대한민국 수능의 결과이다. 보편적으로 대학입시에서 수능 하위등급이 상위등급을 이긴 것을 본 적이 없다. 학습의 성과가 오직 학업성취로 귀결되는 상대적 경쟁구도가 대학선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입시는 구미 입시제도와 사뭇 다르다. 각 나라의 사회·문화적 차이가 시험방식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학입학 자격이 고교 졸업단계가 아닌 대학 입학단계에서 결정되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영국의 GCE(General Certificate of Education),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독일의 아비투어(Abitur) 등은 고교 졸업시험인 동시에 대학입학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다. 각 고등학교가 시험의 주체이다. 미국의 SAT도 대학입학의 절대적인 요소가 아닌 참고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대학입시가 고교교육을 통제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학의 독점적 지위가 학교의 서열화와 학벌사회를 부추기고 있다. 대학 수학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의 수준이 대학입학의 자격 요건인지 불투명하다. 5지택일형 객관식 시험에 숙달돼야 하고, 99점을 받아도 99.1점이 당락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구조이다. 수능 1등급과 9등급 사이 어디에도 대학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명확한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 성적과 석차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학입시가 시험성적 위주 평가방식으로 긴 줄을 세우고 있다. 교육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학업성취에 몰입돼 있는 만큼 단계별 교육과정이 자율과 정상을 되찾을 리 없다. 독일 아비투어는 해당교과와 연관된 자료를 분석해 논술하는 주관식 시험이다. 답지의 분량도 A4용지 15매 정도이고, 과목당 주어지는 6시간의 시험시간 동안 자신의 논점을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수능은 철저히 출제자의 의도에 순응해야 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기 때문에 창의적 관점, 자유로운 사고는 오히려 오답의 확률을 높일 뿐이다.

상대적 평가제도에서는 학습의 절대적 가치를 달성할 수 없다. 단지 평가기준을 단순화해 결과에 대한 이의와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5지택일형과 같은 객관식 평가가 지배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시험의 공정성, 객관성, 실용성 뒤에는 권위주의적 사회구조에 쉽게 순응하는 인간을 형성하고, 결국 국민의 사고방식에도 헤게모니의 영향을 받게 된다. 매사를 정답과 오답, 흑과 백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 등 정신적인 폐쇄성도 심각하다. 우리 사회는 성적순에 따라 붕당과 패거리로 권력을 독점해 왔다. 심지어 국회에서도 학벌 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한 구조이고 보면 성적에 따른 학벌사회가 집단을 특정하는 은연중 편견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열 없는 대한민국'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수능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수능의 결과가 명문대학 입시경쟁의 동기를 제공한다는 주장은 상위 4% 1등급 정도에 머물러야 한다. 대학서열화와 학벌사회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선발경쟁보다 학습경쟁이 되는 시험제도가 도입돼야 할 것이다. 성적 0.5점의 차이는 백지장보다도 얇을 수 있다. 능력에 따른 차등대우가 당연할 수 있으나 입시경쟁에서 성취한 수능 성적 혹은 명문대 입학이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잠재력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다. 학벌과 능력이 비례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도 경쟁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박탈하는 학벌의 선입견에 있지 않는가.

교육은 순간의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구도가 아니라 정직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협력과 희생정신을 가르치고 배우는 기나긴 여정이다. 개방적이고 자주적인 사고를 존중하는 사회질서, 정치·문화풍토의 유지 발전이 민주사회의 근간이다. 4차 혁명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의 창의적 사고와 유연한 정신을 5지택일형 시험에 가두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