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예총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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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왕성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청년기 때 혼란에 빠져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머니의 기억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쉽게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구질구질하고, 먹먹한 이야기라고. 하나 '운명으로서'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은 끝없는 위안일 수 있다. 재일 한국인 최초의 도쿄대 교수 강상중도 그렇게 말했다. 그는 저서 <어머니>에서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그려냈다.

문화계에서 '엄마 바람'이 줄곧 화두며 식을 줄 모르고 줄기차다. 신경숙의 소설이 그러했고, 영화·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두 '엄마'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극장가에서는 더욱 엄마의 주제가 줄을 대고 있고 안방극장에서도 쉼 없이 등장한다. 영화 속 엄마는 더 다양하다.

모성의 면모를 한 명의 엄마를 통해 드러내는 대신 여러 인물에게 분산 배치하는 다양한 방식을 채택한다. 하지만 모성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등식을 놓고 보면, 문제는 모성이 전형적·무반성적 점을 드러내고 있어 문제다.

서양의 영화가 '부성의 서사'를 드러내는 데 치중했다면 식민지 전쟁의 경험을 거친 한국영화는 대신 '모성의 서사'를 풀길 즐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온 말. "나도 저런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있으면서도 찾았던 소망 충족에 지나지 않는 엄마를 동경하는 때도 있었다.


예상대로 우리는 엄마가 주인공인 영화에는 잘 운다. 하긴 죽는 엄마 이야기에 눈물 흘리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을까만, 뻔한 통속이라고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 현상은 감동이라기보다는 거의 반사작용에 의한 것이리라. 대중예술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상투형을 놓고 보면, 눈물을 위해 엄마는 죽어야 하고 자식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 못 되게 굴고 난 후 나중에 "엄마 미안해"하면서 해피엔딩을 한다. 한마디로 엄마 죽이기를 너무 좋아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무조건적인 모성애로 포장되는 속설이 언제까지 헌신과 죄책감으로 끈적거리게 만들 건지 그 속내를 묻고 싶다.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킨 작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속 엄마는 거의 없다. 못 배우고 사회경험이 전무한 엄마들은 거의 다 저세상으로 가지 않았을까. 이제 늙어가는 엄마는 <자유부인> <맨발의 청춘>등 '세시봉' 세대에나 있지 않을까. 베이비붐 세대 어머니들은 대학교를 졸업해 배울 만큼 배웠고, 자기 안에 욕망이 있음을 깨닫고 산 세대다. 공주병 기질과 우쭐거리며 사회적 변별력과 지식습득 능력이 있는 엄마들이다.

그런데 어쩌랴. 작품 속 엄마, 그리고 영화 속 엄마는 구식 엄마로 무조건적인 희생양이고 헌신성을 반복·재현시키고 있다. 간혹 새로운 엄마상을 정립하는가 했다가도 결말에서는 종래 틀에 박힌 모성으로 회귀시키며 마무리하는 식상함이다.


자식에게 지겹게 집착했지만 배운 것도 사회적 경험도 없이 자식을 어렵게 여겼던 옛날 엄마들보다 훨씬 끔찍한 엄마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젊은 주부들에게 최악의 시어머니를 꼽으라면 대학을 나온 시어머니란다.

옛날 엄마들처럼 바보같이 자식에게 눌려 살지 않고 자기 욕망을 충족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요즘 엄마들은 자식에게 집착하거나 신세를 지지 말고 무관하게 혼자서 씩씩하게 잘 살아야 마땅하다. 저마다 자식들이 엄마의 추억과 자존심을 위해 얼마나 진심으로 공양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뼈아프게 깨달아야 한다. 


자, 이제 가슴에 묻어도 시원찮은 엄마를 그만 죽이자. '엄마를 부탁할' 일도 없다. 보톡스 주사에 끼 있는 얼굴이든 없는 얼굴이든, 엄마는 남편과 혹은 친구들과 하하호호 말년을 사는 것 아니겠나. 그게 순리다. 유치하게 자식 자랑하며, 자신의 삶과 엮어 효도경쟁 같은 건 시키지 말자. 아주 옛날, 어릴 적 부모 자랑하는 애들이 제일 유치했다.

1958년도 만화가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 만화 속 주인공은 행용공모(行傭供母, 날품을 팔아 어머님을 모시다)의 역경을 이기며 엄마를 찾았다. 삼강오륜에 빛날 일이다. 옛날에 불과한 이야기로 치부하며 사는 어머니가 오늘날도 있다면 좀 몰염치한 어머니가 아닐까.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일 뿐이다. 이제 '엄마를 부탁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