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추사박물관에 추사 김정희의 서신 23점이 있다.

동생 김명희·김상희와 지인 민태호 등에게 보낸 것인데, 봉피와 함께 전래돼 연대와 수신자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4호다.

김정희는 영조가 사랑한 화순옹주와 세도가 경주 김씨 김한신의 증손자다.

일화에는 24개월 만에 출생했는데, 뒤뜰에 우물이 마르고 뒷산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샘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 그가 어린 시절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의 글씨를 본 재상 채제공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떨칠 것이나, 글씨를 잘 쓰게 되면 운명이 기구해 질 것이니 절대로 붓을 쥐게 하지 말라. 대신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다.

이에 아버지 김노경은 아들 김정희를 당시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 밑에서 수학하게 했다.

또 아들과 함께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김정희는 평생의 스승 옹방강, 완원을 만나 금석학을 배우게 된다.

34세 과거에 급제해 10년간 요직을 섭렵하며 황금기를 누리던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 세력들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됐다.

하지만 9년간 귀양살이 동안 최고의 걸작품 '세한도'를 그렸고,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하고 비틀어진 듯한 파격미가 특징인 '추사체'도 완성했다.

말년에 김정희는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편지를 썼는데, "일흔 먹은 추한 몰골"이라든지 "온갖 감회가 오장을 휘감고 돌아 견딜 수가 없다"라는 문구 등으로 심경을 표현했다.

반 백살 필자도 더 이상 거울을 보며 흐뭇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굳이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오랜 입원의 경험으로 햇살의 따스함을 가슴으로 알게 됐고, 이제는 늙고 병든 부모님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지금의 나이도 충분히 좋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