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대함에 있어 성냄을 경계하고 천천히 일의 전후 사정을 파악하라.", "한 가지 일을 더하는 것이 한 가지 일을 덜어내는 것만 못하다."

키 작은 청렴 대감 이원익이 자손에게 친필로 써 준 훈계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광명시 충현박물관에 있다.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일 수 없는 사람' 이원익은 키가 유난히 작았다.

가난한 어린 시절 잘 먹지 못했고, 늘 원인 모를 병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22세 관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청렴하게 일을 잘 처리해 이이에게 큰 칭찬을 받는 등 평이 좋았다.

45세 이조판서(現 행정안전부장관)로 임진왜란을 맞이한 이원익은 "국왕은 사직을 위해 죽음도 불사해야 하며, 명으로 건너간다 해도 편치만은 않을 것"이라며 왕에게 간언했다.

문인이었으나 병법에도 밝아 명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했다.

또 이원익은 선조에 이어 광해군에게도 신임을 받아 영의정에 임명되지만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 파직돼 유배됐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8년 만에 복귀한 이원익은 광해군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는 반정 실세들에게 "나도 폐주를 받들었던 신하이니, 벌하려면 나도 벌하라"며 설득해 끝내 광해군의 목숨을 지켜냈다.

또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영의정 등 고위직에 있었으나 집은 비가 샜고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이에 인조가 비단을 하사했지만 "명분 없는 물품은 누가 내려줘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고, 생계는 돗자리를 직접 짜서 해결했다.

생명체는 자손에게 생존방식을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유전자가 살아남을 확률을 높인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알기 어렵다.

의료기기 발달로 의사 직업이 사라지고, 인공지능 로봇이 변호사를 대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기술은 원하면 언제든 얻을 수 있다.

오히려 저녁 밥상의 행복과 일상의 감사함을 깨닫는 것이 어렵다.

우리에겐 여유가, 아이들에겐 자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