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 이른바 '존엄사법'이 이번 주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회복 가능성이 없고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에 한해 그의 의지에 따라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벨기에와 스위스 등의 나라에도 비슷한 법이 있지만, 환자의 요구가 있다면 약물 투여 등의 방법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점이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각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존엄사'는 폭넓게 해석된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가 하면 치료 중단 등의 다소 소극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존엄'의 문제는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 법의 도입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법이 막 도입된 시기이기에 시행에 따른 긍정·부정성을 논할 수는 없으나, '잘 죽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는 있다. 죽음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권리이기에 '잘 죽고 싶다'는 고민을 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황정은의 단편 소설 <낙하하다> 속 '잘 죽는 것'을 소망하는 주인공이 떠오른다. 그이는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절이 오면 제철 과일을 양껏 먹으며 살다가 천재지변이나 병으로 인한 죽음이 아닌, "양지바른 곳에서 죽고 싶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들은 한 사람은 그녀에게 "요즘처럼 사람의 죽음이 험한 세상에서 평생을 좋은 일을 하고 정갈하게 살아도 올까 말까 한 지복을" 바란다고 말한다.

한 가지 애로사항은 잘 죽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잘 사는 일이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죽기는커녕 잘 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천재지변은 물론 산업재해, 대처 미흡으로 인한 참사, 차별과 혐오로 인한 살인이 벌어지는 곳에서라면 어떠한가. 소설 속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이 험하게 죽어가는 세상에서 '잘 죽고 싶다'는 소망은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사치스러운 바람일지도 모른다.

어떤 죽음은 '잘 살지 못한'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지곤 한다. 잘 사는 일의 중요함을 떠올리는 것은 '잘 죽기 위한'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