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경제연구소장
무리를 지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어떤 것이 옳고, 옳지 않은 인간관계인가를 가름하는 것은 유사 이래 최대의 과제다. 특히, 잘못된 인간관계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손실은 어떻게 회복하거나 보상되어야 할 것인지까지를 정하려하면 이야기는 끝도 없이 복잡해진다.
이러한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 정의론이나 법철학 따위의 학문 체계를 세우고 수많은 절세의 현인 천재들이 모두 동원되어 매달려 보았지만 아직도 인류의 지혜는 그에 대한 해답을 내지 못한다. 인간의 머리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인 것 같아 성인의 말씀들을 종교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 해결해 보려는 노력도 하지만 결국 인간의 미욱한 언어로 전달되는 가름침은 각자의 욕심을 따라 천 갈래 만 갈래로 해석이 갈리고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문명의 초기 인간들은 이러한 문제를 복수(復讐)라는 수단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함무라비 법전의 기록이나 팔조법금, 성경 등에 보이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해결하는 소위 '탈리오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습관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서 형법의 처벌 양형이나 민법상의 보상기준에 그대로 그 형태를 보전하고 있다.

아무리 수천 년 문명과 문화가 발달해 왔다고 할지라도 "지난 일은 지난 일, 모두 잊어"라든지, "복수는 복수의 순환을 낳는 법, 모두 용서 한다"라는 정도의 집단적인 해탈은 요원한 것이고 인간 사회의 정의와 법에 관한 논쟁은 아직 복수와 보상이라는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연출하는 복수극들은 당사자가 아닌 관람자들에게는 짜릿한 흥분을 자극하기도 한다. 특히 복수의 주인공이 정의라는 개념을 앞세울 때면 그러한 복수극은 권선징악이라는 교과서적인 권위까지 확보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의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무술영화들의 줄기찬 주제가 복수이고 미국 서부극들의 거의 모든 주제가 악당의 행패에 대한 멋진 복수극이다. 우리 고전문학의 주된 주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콩쥐팥쥐, 춘향전, 장화홍련, 홍길동전…, 따지고 보면 심청전에 박씨부인전까지도 모두 가난이나 부당한 운명 등에 대항하는 반전의 복수극들인 셈이다.
그러한 복수극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에게 사랑을 받은 이야기가 아마도 프랑스의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가 1844년에 지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닐까 싶다. '에드몽 당테스'라는 주인공에 의해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다소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바탕에도 불구하고, 아주 교묘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구성과 주뼛대는 것 없이 통쾌하게 펼쳐지는 복수극의 장면들로 인해 시종일관 독자들을 긴장과 흥분 속으로 몰아넣는다.

더욱이 시원하게 복수를 모두 끝낸 주인공이, 사랑하는 이들의 삶까지 모두 알뜰하게 정리해주고 막대한 재산까지 챙겨준 다음, 자신은 바다 저편으로 복수의 현장을 떠난다는 마지막 설정은 얼마나 멋스러운가. 정의의 승리는 언제나 그런 모습에 갈증을 품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가슴을 선동하는 최고의 도구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나 소설 속의 이야기들과 달리 현실적으로 시정(市井)에서 벌어지는 복수들은 결코 그렇게 아름다운 경우를 찾기가 어렵다. 정의의 개념은 애매하고 복수의 현장은 대개 추악하고 잔인하며 비인간적이다. 하물며 아름답고 멋진 복수의 끝맺음이라는 설정은 영화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 아마도 그렇게 현실과 다른 매력 덕분에 영화와 소설이 팔리는 것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복수극이 정치라는 집단적인 양상을 띨 경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처참하고 비인격적인 모습은 세상에 저질러지는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대표한다. 전쟁과 혁명, 왕조의 교체 같은 경우뿐만 아니라 때로는 숙청과 사화(士禍)라는 이름의 권력 투쟁의 경우에서 우리는 그러한 모습들을 줄기차게 확인한다. 우리는 복수극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정치적으로 집단화할 때 정의의 개념은 패거리의 논리로 바뀌고 그 잔인성은 더욱 극단화하며 차단하기 힘든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에서 알고 있다.

개인이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삶이 위기인 때 복수에만 매달린다면 그런 인격이 지지를 받을 수는 없다. 나라의 모든 영역이 누란의 위기인 때 국민들은 모두 극장에 앉아 '몽테크리스토 백작' 영화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다면 그보다 더 위험한 나라는 없다.

처칠은 "복수는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이라는 비용이 드는 행위다. 정치적인 보복은 가장 악성적인 것이다."라고 했고, 링컨은 "개를 죽인다고 물린 자리가 낫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때 '일반대사면' 같은 수단이라도 동원해서 대동 단합의 계기를 만들고 다함께 나라의 내일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