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해양 도시다. 우리민족이 바다를 다시 보고, 해양사를 쓰기 시작한 곳이다. 1883년 제물포를 개항하고 세계무대에 등장한다. 새로운 문화와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근대 해양 도시의 모습을 갖춘다. 수많은 해외 문물과 사람들이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고 큰 선박들이 정박할 수 있는 축항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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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가 바닷길을 밝히고, 세관이 문을 열고, 해군 양성학교를 세우고, 국제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곳이 바로 인천이다. 처음 도입한 군함이 정박하는 모항이 인천항이고, 함장 역시 인천사람이다. 천일염 산지인 주안염전 개설, 조선인 무역상 순신창상회 탄생 등 해양산업을 시작하고, 수족관과 월미도 조탕, 해수욕장 개설 등 해양관광시설이 들어선다. 또 갑문식 독(DOCK) 설치, 해상 무선 통신, 기상관측 등도 인천에서 이루어진 해양의 역사다.

여기에 국립해양대학교 설립, 컨테이너 부두 설치 같은 사실은 인천이 해양의 핵심도시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인천은 '최초'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는 해양관련 시설과 기관이 들어서면서 해양도시의 체계를 갖추고 한·중·일 배들이 오고가는 동아시아 중심 항구로 자리잡는다.

먼 옛날부터 인천만(仁川灣)은 삶의 터전이요, 지역 정체성의 모태였고, 오늘날도 지역경제의 33% 가량을 바다에서 일궈나가고 있다. 인천 앞바다는 근대화와 통일의 길목이고, 대양으로 뻗어나가는 출발점이다. 침략의 야욕과 문명이 교차하고, 사나운 전쟁의 바다인가하면, 등대지기의 사랑을 노래하는 평화의 바다이기도 하다.

인천의 옛이름 제물포는 예로부터 연안의 도서와 육지를 잇는 한적한 포구였다. 바닷가는 보석처럼 빛나는 모래사장으로 덮여 있었다. 이는 프랑스 외교관이 남긴 기행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인천사람이 잊고 있는 인천의 모습이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면 저 깊은 해저에서 솟아 올라온 산더미 같은 모래더미를 밀고 와 언덕에 쌓아서 섬에다 자연적인 방파제를 만들어 놓곤 했다. 햇빛이 비치면 이 사주(砂洲)는 마치 장려한 여신을 장식하는 거대한 보석 목걸이처럼 빛났다. 그건 참으로 눈부신 광경이었다." (끌라르 보티에·이뽀리트 프랑스뎅,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태학사, 2002)

연안부두, 개항, 독(dock), 무역항. 이 4개의 키워드는 오늘날 인천을 상징하는 단어가 아닐까. 여기에 공항과 수출산업단지를 더 추가할 수 있겠다. 결국 '바다'를 빼놓으면, '인천'은 없다. 300만 대도시로 성장한 인천은 바다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전통적인 포구, 제물포는 이제 우리나라 대표 '해양도시, 인천'으로 거듭났다. 인천의 역사는 바다의 역사다. 그럼에도 인천은 공업도시로 불리며, 시민들은 푸른 바다를 잊고 있다. 개항 이후 전개된 인천의 해양사를 집단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다. 이에 인천일보는 해양문화의 관점에서 인천해양사를 되짚어보는 '인천은 왜 해양 도시인가'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