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숙 백석대 교수
코헛(Kohut)은 유아들이 자라면서 정상적 자기애성을 갖는 것은 원초적 전능성 경험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보살피는 사람이 아이의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돌보고 안아주고 함으로써 자기애성은 생겨난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전능감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도 서너살 무렵이면 말을 하면서 어린이집도 가고 다른 친구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관계를 한다는 것은 나와 너의 관계이므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잘 안되고 어렵다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코헛은 건강한 아이의 발달에 '최적의 좌절경험'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아이의 욕구나 기대를 모두 채워주기만 하면 버릇없는 아이로서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치원 시기가 되면 아이와 엄마의 욕구가 상충 대립되기도 하고 아이는 야단을 맞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아이는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한계와 외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능력이 생기게 된다. 적절한 '최적의 좌절경험'은 오히려 아이에게 한계설정과 현실능력을 키워줄 수 있다. 아이는 엄마의 돌봄 속에서 공감을 먹고 자라야 내면이 튼튼하고 정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렇게 발달한 적절한 자기애는 건강한 성격의 필수요소다. 정상적인 자기애의 발달을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의 공감적 반영이 필수적이다. 부모가 보여주는 일관적인 지지나 애정은 원초적 전능감의 건강한 측면을 지켜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아이는 자신이 괜찮고 편안한 존재임을 알고 살아가게 된다. 코헛은 유아기의 거대자기에 대한 좌절경험이 없거나 또는 좌절경험이 너무 심하면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발전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도 거대자기라는 방어 구조는 갈등적 대상관계에서 생긴 것을 병리적으로 응축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기애성 성격 방어는 자신의 강렬한 자기애적 분노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신념, 음식과 사랑이 결핍된 위협적인 세계상, 죽이고 먹고 생존한다는 배고픈 늑대라는 자기개념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기제이다.

베르벨 바르데츠키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식이장애 자체만으로는 폭식증 환자들의 근본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여성적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을 규정하였다. 여성들이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자립'과 '의존'이라는 두 개의 대조적 행동양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는 것이다.
내가 상담한 한 여성은 이 세상 사람들을 원숭이라고 표현한다.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치졸하다는 생각은 엄마를 보면서 생긴 관점이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실수를 하거나 고집을 부리면 많이 혼을 내고 때리고, 옷을 벗겨 대문 앞에 서 있도록 하였다. 그때의 수치심과 부끄러움은 지금 생각해도 두렵고 치가 떨린다.

엄마는 생존을 위해 생활력이 부족한 아빠를 대신하여 공장에서 주야간 근무를 해야만 했었고 공장의 온도가 높아 매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하므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소진되어 들어왔다. 우리에게는 매우 히스테리적이었다. 엄마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고 마치 동물이 포효하는 듯한 싸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엄마의 이런 광기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 일은 나 혼자 알아서 해야만 했다. 지금도 나는 내 일에서는 누가 말하지 못하도록 완벽을 추구한다.

혼자 있을 때는 우울하기보다는 공허함이 밀려온다. 그런 공허함을 느끼지 않게 위해 나는 일부러 스릴 넘치는 살인추리극영화만 본다. 나는 내가 타인에게 자상하고 배려 깊은 사랑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결혼해서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상담과 좋은 경험을 통해 이제 내담자는 사람은 동물적인 면도 있지만 따뜻하고 우아하고 멋진 면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가고 있다. 자신을 존중하고 공감해주는 타인들을 통해서 삶은 아직도 살 만하고 재미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도 배우고 느끼고 알아간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내안의 표상에 자리를 잡은 무서운 엄마, 불행한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나도 모르게 똑같이 그런 엄마가 될까 두렵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어린 시절 각인된 엄마의 이미지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등과 함께하는 가족상담은 이렇게 끝난다. 인생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하며 잘못된 행동에 용서를 비는 엄마에게 딸은 "엄마 괜찮아"라고 위로해 준다. 엄마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하기로 한다. 우리는 살면서 실수와 결핍들을 서로 채워주고 보듬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