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수 남구청 문화예술과 전문위원
▲ 일본기선과 경쟁하고 있는 대한협동우선회사의 인천항 출발 기선 신문광고(황성신문, 1904.01.11.)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인천은 지정학적·경제적 요인에 의해 동아시아 해운망의 중요 기점으로 떠오르며 외국 해운업과 상인의 진출과 경제적 침탈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개항장과는 달리 조선인의 경제활동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고, 인천에서 조선인 상회사(商會社) 설립과 해운업의 발전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때 외국 상인의 경제침탈에 대한 효율적 대응과 상권 신장을 위해 여러 사람의 자본을 더한 합자회사로 '상회사'가 등장하는데, 인천에서 최초로 설립된다. 1883년 대동상회(大同商會, 무역)를 시작으로 순신창상회(順信昌商會, 무역), 1885년 태평회사(太平會社, 무역), 1886년 제흥상회(濟興商會, 무역), 1889년 광성회사(廣城會社, 무역), 1893년 육운회사(陸運會社, 운수업), 1896년 선상회사(船商會社, 연안무역), 1897년 광통사(廣通社, 해운업), 1901년 대한운수회사(大韓運輸會社, 해운업) 등이 민간 주도로 인천에 연이어 설립되기에 이른다.

한편 1893년 1월 중국의 윤선초상국을 모방한 반관반민의 이운사(利運社)가 설립되어 기선 5척으로 세곡운송을 주로 하되 때때로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며 해운업의 발전을 꾀한다. 한때 인천항에서의 조선선박 점유율이 급증하기에 이르렀지만, 관기업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경쟁에서 도태되고 만다.

더욱이 국제항로뿐만 아니라 개항장에 거점을 둔 일본인 운송업자들은 연안 해운업에 종사하면서 해운권을 침식해 들어왔다. 대표적 사례가 인천 거류 일본상인 호리(堀久太郞)가 설립한 호리상회였다. 1892년 인천~용산 간 한강 항운업을 시작으로 '인천~목포, 인천~평양, 북관(北關), 진남포~평양' 등의 항로를 개설하여 조선 연안을 두루 회항했으며, 국제 항로도 운용하였다. 또 비개항장을 불법적으로 항행하여 조선 연안 해운권을 유린하였고, 막대한 수익을 얻어갔다.

그 와중에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윤용(李允用)과 정치국(丁致國) 등은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항해권을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1900년 6월 대한협동우선회사(大韓協同郵船會社)를 설립하여 근대적 해운업에 종사하였다.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사위이자 을사오적 이완용의 이복형이고, 정치국은 부산 출신의 객주로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의 회두를 지낸 인물이다. 이 회사는 기선 5척을 국제·국내 항로에 각각 배정했으나 대체로 인천항을 중심으로 '만경대~진남포'와 '군산~목포~제주도~부산~원산~북관' 등을 경유하며 서해·남해·동해 연변을 모두 항행하였다. 호리상회와 일본우선주식회사 등과 경쟁을 시도할 만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나, 러일전쟁 발발로 운항은 중단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외에 1900년 인한윤선합자회사(仁漢輪船合資會社), 1901년 대한통운사(大韓通運社), 1904년 유성태호회사(裕盛泰號會社) 등도 설립되어 인천을 중심으로 서해연해와 주요 포구를 이어주었지만, 외래 해운기업과 러일전쟁으로 모든 운항은 단절되고 만다.

결국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보호국화한 일본은 압력을 행사해 1905년 협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장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이라도 일본선박이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이 때문에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소규모의 민간 해운업도 몰락하고, 모두 일본 해운회사가 독점하게 된다.

나아가 1912년 조선총독부는 통치강화와 전시 수송력 확보를 목적으로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郵船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조선의 국내외 정기항로는 식민지 수탈체제를 보완하는 구조로 재편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일제에 종속되었지만, 자주적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던 여러 가능성을 개항장의 조선인 경제활동을 통해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