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길의 길목' 숙명은 거기서 시작됐다
▲ 강변구 지음, 서해문집, 296쪽, 1만3900원
"인천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월미도요."
월미도는 외지 사람들에게 '인천의 상징'이다. 월미공원과 월미앞바다가 함께 있는 곳 월미도는 그러나 파란만장한 우리 근대현대사가 파뭍혀 있는 곳이다.

새책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작은 섬 월미도가 겪은 큰 전쟁들>(서해문집·296쪽)은 '불야성의 섬'뒤에 감춰진 비극을 이야기 한다. 인천항은 개항 전부터 수도 한양으로 향하는 뱃길의 길목이었고, 바로 옆 월미도는 인천항 정면에 버티고 있는 이정표이자 수도로 들어가는 뱃길의 아주 중요한 길목에 자리한 섬이었다.

월미도를 지나지 않고는 인천항을 통과할 수 없었고, 바로 이 지정학적 운명 때문에 월미도는 평화로운 시기엔 주민들의 고향이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원이었다가 전쟁이 나면 곧바로 군사 요충지로 변해 군대에 점령당하는 숙명을 갖게 된다. 이 숙명을 따라 프리모게호, 콜로라도호, 제너럴 셔먼호 등 강대국들의 군함 전시장으로 전락한 월미도 앞바다는 운요호 사건 이후 한일합병이 되면서 역사의 거친 파도를 정면으로 맞는다.

단돈 15만원에 일본 정부에게 팔리는가 하면, 식민 지배의 타당성을 전시하는 일본의 일그러진 인공 낙원이 되었다가, 해방 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인민군, 미군에게 차례차례 점유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계속 전진하자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1950년 9월10일 아침 7시부터 다섯 시간 동안 미 폭격기는 마을에 네이팜탄을 퍼부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기관총을 쏘아댔다.

약 120가구 600여명이 살던 마을은 그날 잿더미로 변했다. 왜 미군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폭격한 걸까? 어째서 무장하지도 않은 민간인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을까?

당시 미군은 월미도 민간인 마을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광복 직후 마을 정면에 미군이 들어와 근무했고 당시 주민들 역시 미군이 월미도 내 민간인 주거지를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노라 증언했다.

그러나 인천에 파견된 정보장교의 첩보에는 마을 주민 600여명을 포함해 1000명(인민군 400명)이 인민군, 즉 적으로 보고됐다. 월미도의 방어 수준을 과장해서 받아들이게 된 미군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불확실 요인을 줄이기 위해 민가와 주민까지 적의 시설과 병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오인 폭격이나 어쩔 수 없이 생긴 부수적 피해가 아닌 정밀하게 짜인 작전 사살이었다는 것이다. 강변구 지음, 1만3900원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