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계획위 숭의동 360번지 일대 정비구역 해제 주택사업 길 열려
▲ 속칭 옐로우하우스라 불리던 숭의동 성매매 집결지가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한다. 외세 문물의 유입과 전쟁,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격변의 세월을 지닌 집결지는 이제 숭의동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게 된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속칭 옐로우하우스라 불리던 숭의동 성매매 집결지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한다. 인천항 개항 직후 성매매 집결지가 생긴 이후 근 130여년 만에 인천지역에 집결지가 공식적으로는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외세 문물의 유입과 전쟁,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여러 차례 변화를 겪어 왔던 성매매 집결지는 수많은 화제와 애환을 남긴 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 숭의동 일대 공동주택으로 변모

인천시는 최근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숭의동 성매매 집결지가 포함된 남구 숭의동 360번지 일대 '숭의1 도시환경정비사업 정비구역 해제 결정(안)'에 대해 원안 가결했다.

숭의1 도시환경정비구역은 토지등소유자가 정비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지난 2015년 조합원 총회를 거쳐 지역주택사업으로 전환이 추진됐다. 인천시와 남구 등은 관계기관과 합동대책회의를 열고 정비구역의 해제 및 지역주택조합 설립을 위한 행정지원을 진행해 왔다.

시는 이번 정비구역해제로 향후 주택사업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됨에 따라 향후 사업 추진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천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성매매 집결지의 폐쇄도 추진돼 숭의역 일대가 도시 미관 향상과 역세권 개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남구는 최근까지 이 곳에 33개 관리업소중 16~17여개 업소에서 70여명의 여성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자활지원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구는 민간단체 등과 협력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기술교육 및 취업훈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숭의1구역 정비구역의 해제는 지역주택조합 설립을 위해 필요한 조치로 향후 지역주택조합 사업의 추진으로 기존 노후건축물의 정비와 주변지역의 환경을 개선하고 인천의 대표적 성매매 집결소인 옐로우하우스의 폐쇄를 가속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인천지역 집결지

2007년 학익동에 이어 숭의동 성매매 집결지가 정리되면 인천에서 집단 성매매 집결지는 사실상 모두 정리되는 셈이다.

엄격한 관련 법과는 달리 성매매 집결지는 사실상 지역내에서 존재했으며 그 곳에는 수많은 여성이 생업을 이어갔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도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사실상 공식화 됐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이전해 대규모로 자리를 잡게 된다.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김희식의 논문 '20세기 인천의 도시화와 매춘문제 고찰 - 끽동과 옐로우하우스를 중심으로'를 보면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일본 거류지가 확장되면서 매춘이라는 특수한 목적성을 띤 유곽 등의 공간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인 거류지가 확장되면서 해군의 출입이 잦아졌고 매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태범의 『인천한세기』에는 '신생동에서 신흥동으로 접어드는 인천여상 부근과 답동성당 언덕 아래, 그리고 전동 인일여고 아래길 주변에 사창굴이 생겼다'고 표현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본격적인 도시건설에 나선다. 매립 등을 통해 도시가 확장되면서 유곽도 점차 도시 외부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강제합병 이후 1911년 일제는 기정동 밖에 산재돼 있던 조선인 유곽들을 부도정 안으로 집결시켰고 1916년 관련 규정이 생기면서 공창제의 틀이 완성됐다. 1920년대 들어 현재의 동인천역 일대를 중심으로 유흥공간이 확장된다. 1930년말 만주사변 이후 공장이 새로 지어지거나 확장되면서 공장과 주택을 지을 땅이 부족해지면서 도시민관 등의 이유로 집장촌도 외곽으로 이전하게 된다.
매춘공간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1947년 미군정과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이 공창제폐지법률을 발표할 당시 인천 부도정에는 23개 업소에 168명이 있었던 것으로 집계됐지만 여러 곳에서 '사창'이 존재했다. 율목동에는 리키다케(力武) 별장 인근이 미군상대 사창굴이라는 소문이 언론보도됐고 송도와 옥련동 일대도 매음이 횡횡했다고 한다. 인천의 도심지대인 사동, 신생동, 신포동에는 한국전쟁 당시 9·15수복 이후 창녀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포주만도 50여명에 이르러 매음화 됐다고 인천신문은 1960년 12월5일자에 보도했다.

한국전쟁 전후 UN군이 주둔하면서 전동 미제 110부대, 만국공원 미 고사포부대, 해안동 미군소방서, 21항만 사령부, 송도 미 CAMPPAGE 포 부대 미제 439 공병대, 학익동과 횽현동 P.O.L 송유부대, 학익동 미제 76 공병대, 부평 미제 8057부대, 부평 미제 69대대, 부평 미해병대, 영종도 미68포 부대, 미제 44공병대가 주둔하면서 인천 곳곳에 기지촌이 생겨났고 1953년부터 부평 조병창 자리에 캠프 마켓이 자리를 잡으면서 '쌍둥이 양공주 마을'이 형성됐다. 1954년 9월부터 미군이 떠나면서 부대재편이 시작됐고 매춘 공간이 도심지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선화동 30번지 일대는 일제강점기 부도유곽으로 불리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유엔군 위안소로 사실상 공인됐다. 1961년 숭의동으로 이전될 당시 23호에 200명의 여성이 있었던 이 곳은 현재 신흥시장으로 변모했다.
1962년 박정희 정부 시절 윤락여성 선도계획에 의하면 인천지역은 인천 4곳, 부평 4곳, 강화 1곳 등 모두 9곳이 특정지역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학익동은 경인공업지대 등을 제외하면 자연촌락이 정주하던 형태였지만 미군 및 UN군의 재배치가 맞물리면서 1960년대 매매춘이 횡행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끽동'이라 불리며 1976~1981년 102개 업소에 1000여명의 매춘여성이 있을 만큼 번성했던 학익동은 공장지대가 주거지역으로 바뀌면서 점차 쇠퇴해져 갔다.

2003년 학익동 법조타운 건립과 2004년 성매매방지법 시행이 맞물리면서 2007년 아파트단지로 탈바꿈됐다. 남구 숭의1동 360번지를 중심으로 383번지까지 밀집돼 있던 '옐로우하우스'는 건물입구에 1~33번의 관리번호가 부여될 정도로 사실상 공창역할을 했다. 여관지대였던 이 곳은 1980년 외항선원을 상대로 한 영업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2004년 성매매방지법 시행직전 32개 업소, 170명이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남겨야 할 것들

2000년대 중반 학익동이 재개발되면서 남긴 것이라고는 인천시가 발간한 「학익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라는 20여 페이지의 짧막한 학익동 성매매집결지 정비 결과 보고서가 전부다. 학자들의 몇 편 안되는 논문이 지나간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숭의동도 사정이 비슷하다. 남구가 여성종사자를 대상으로 기술교술과 취업훈련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을 제외하면 숭의동역시 학익동의 전례를 따를 것이다. 지역 사회·역사학계에서는 마지막 집결지인 숭의동의 사례를 어떠한 형태로든 역사에 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희식은 논문에서 "매춘공간은 재개발이라는 단편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면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의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경제성 보다는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김칭우 기자 chingw@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