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관장군묘.
파주시 광탄면에 윤관 장군 묘가 있다.

무덤이 어딘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해 조선 영조 때 공인했다. 사적 제323호다.

고려 초기에는 여진족(당나라 때 말갈족, 청나라 때 만주족이라 불렸다)과 관계가 좋았다.
귀화한 여진인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줬고, 여진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고려와 무역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진족이 다른 부족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넓히자 고려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첫 충돌에서 윤관은 참패했다. 보병으로 기병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는 모든 백성이 참여하는 국가 특공대, 별무반을 창설한다.

즉 현직 문무 관리를 제외한 말을 가진 모든 남자는 신기군으로, 말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과거 준비를 하지 않는 20세 이상 남자는 모두 신보군으로, 승려들은 항마군으로 편성한 것이다.

윤관은 이렇게 17만명을 모아 3년간 집중 훈련시킨 후, 한겨울 여진정벌에 나섰다.

우선 예전에 사로잡았던 포로를 풀어주겠다며 추장 400여명을 초청했고, 술을 먹인 후 복병을 동원해 모두 죽였다.

이후 무장 척준경과 함께 여진족을 몰아내고 성을 쌓으니 이가 동북 9성이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여진족의 반격은 필사적이었다.

이에 고려는 '자손 대대로 조공을 바치고, 기와 조각 하나도 고려에 던지지 않겠다'는 약속만 받아낸 후 1년 만에 동북 9성을 돌려줬다.

또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윤관을 파직시켰다.

중신들은 윤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예종은 여론이 잠잠해지길 기다려 복직시키려 했지만 윤관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윤관에게는 한스런 일이었지만 동북9성 반환은 결과적으로 고려에 이득도 많았다.

금나라는 거란과 송을 멸망시켰지만 약속을 지켜 고려는 침공하지 않았다.

또 여진은 거란과 영토 다툼이 있었던 보주(신의주)를 고려에 넘겨줬다.

고려와 뿌리가 같다고 생각한 여진은 신의를 지켰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나라 현 정세를 보면 대화 상대도 찾기 어렵고 속내도 알 수 없다. 움츠릴 수도 날아오르기도 어려운 국면이다. 지혜를 모아 묘수를 찾아야 할 때다./김진효 경기도 문화유산관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