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보 창간호·현순자사 진본 … 희귀 자료들 소개
인천시립박물관의 분관인 한국이민사박물관은 9월5일부터 12월3일까지 '새롭게 보는 하와이 韓人독립운동 자료전'을 연다.

이번 전시는 2008년 한국이민사박물관 개관당시 입수된 자료들 중 상설전시를 통해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들을 위주로 구성했다.

전시는 '1부 하와이 한인 독립운동사', '2부 하와이 사람들', '3부 하와이와 대한민국, 인천'으로 구성했다. 1부에서는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사를 미주지역과 연관해 4기의 시기로 구분, 전시한다. 2부는 하와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관련자 및 단체들 10여명을 선정, 각 부문별로 3개의 섹터로 나누어서 소개한다. 3부 '하와이와 대한민국, 인천'은 광복 후 하와이동포들과 대한민국의 인적 교류, 또한 이민자의 고향 인천과의 깊은 관계를 서술했다.

1부, 2부에서는 그동안 국내외에 존재는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던 일부 희귀한 자료를 소개한다. 하와이 초기 민족단체 자강회(自强會)에서 펴낸 <자신보(自新報)>는 아직 국내에서 잘 소개되지 않은 자료이다. 특히 박물관이 소장한 <자신보> 창간호는 아마도 국내 유일본으로 추정된다.

또 국내에서는 아직 존재가 뚜렷이 부각되지 않았던 현순(玄楯, 1880~1968)이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필사본 <현순자사(玄楯自史)> 진본이 소개된다. 현순은 역관집안 출신으로 관립영어학교와 일본유학을 갔다온 엘리트였다. 그는 1903년 두 번째 이민선을 타고 통역자로 하와이에 건너갔다. 1907년에 귀국해 <포와유람기>라는 하와이 견문록을 남겼다.(1909년 발간, 포와(布哇)는 하와이를 뜻하는 한자 지명)

그는 국내 3·1운동 거사계획에 참가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문서를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보내기 위해 상해로 밀파됐다. 3·1운동 이후 많은 독립지사들이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1920년 4월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미국 워싱턴에 부임했으나, 서재필·정한경 등과 갈등을 빚고 워싱턴을 떠나 1923~26년 호놀룰루의 감리교회에서, 1926년부터는 카우아이Kauai로 가서 목회 및 한인 지원 활동을 했다. 1940년까지 15년간 카우아이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은퇴한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1968년 별세했다. 그의 자녀들 역시 한민족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이들 집안의 가족이 기증한 자료와 현순 자신이 직접 쓴 2종의 필사본 등이 소개된다.

이 외에도 목회자로 하와이에 와서 동포들을 위해 평생을 지도자로서의 삶을 걸었던 민찬호 목사, 이민 2세들이 민족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뒤에서 이들을 지원했던 강영각·황혜수, 사진신부로 왔다가 대한부인구제회에 참가해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던 강인한 여성 등과 관련된 자료들이 소개될 예정이다.

3부는 광복 이후 하와이와 인천의 교류를 중심으로 현대사 속의 교류관계를 살펴본다. 인천은 하와이 이민자들이 배를 타고 떠났던 마지막 고국 땅이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 이민자의 상당수가 인천 사람들이었기에 인천과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대표적으로는 인하대의 설립이 바로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딴 것이며, 한국이민사박물관의 개관이야말로 인천-하와이의 영원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와이의 한인 이민자들은 이역 만리 먼 땅,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땀흘려 번 돈을 아낌없이 바쳤다. 또한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으며, 자녀들은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이러한 이민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하와이와 미주지역의 한인 이민은 성공한 이민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성공적 평가의 기초를 이룬 것은 바로 115년 전(1902년) 이곳 인천을 떠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간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미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이번 전시는 민족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떠났던 우리 동포들의 애환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