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따라 줄잇던 'L'자형 초가 … 전원주택으로 탈바꿈
▲ 1947년 당시, 선두포엔 L자형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다. 사진은 한국 전통 초가집 이미지. /아이클릭아트
▲ 현재 선두포엔 개량형 주택과 현대식 전원주택이 혼재해 있다. 사진은 지금의 선두포 전경.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 유재용 옹의 집은 옛날 L자형 초가집을 개량한 집이나 아직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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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아궁이 전형적 농촌… 화분 많으면 '잘사는 집'

80년대 이후 개량형 늘고 귀촌해 지은 현대식 혼재


코넬리어스 오스굿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선두포란 뱃머리 포구를 뜻하며 수세기 전에 제방이 건설되고 나서 선두포와 그 밖의 몇몇 리들은 마리산 사이의 염전 대신에 논을 경작해 살아가면서 내륙의 정착지가 됐다"고 선두포 마을을 설명하고 있다.

오스굿이 1947년 찾은 선두포는 2개의 '반'으로 구성돼 있었다. 근처의 두 마을 안에 있는 4개의 반은 선두구를 이루고, 이 구는 길상면의 19개 구 중의 하나라고 기술하고 있다, 선두포는 선두리의 열 개의 마을 중에 하나이며 선두리는 길상면의 6개 구역 중의 하나였다.

오스굿이 바라본 선두포는 당시 이런 모습이었다.

선두포엔 28채의 초가집에서 169명이 살고 있다. 배들과 어망이 해변에 보관돼 있는 모습을 제외하고 선두리 마을들은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집들은 직선으로 서 있지 않고 계곡의 울퉁불퉁한 부분으로 따라 이어지다가 그 부분을 넘어 끊어지면서 점점이 흩어져 있다. 집들의 방향은 정확치 않으나 문들은 대부분 저지대와 바다를 향해 나 있다.

집들의 구조는 직사각형, L자형, 2중 L자형, U자형(입을 벌린 형)으로 나뉜다. 직사각형은 1채 뿐이었고, 가장 표본이 되는 가옥은 L자형이었다. L자형은 각기 다른 용도로 쓰이는 3개의 방으로 나눠져 있다. 선두포엔 14채의 L자형 집과 10채의 2중 L자형 집들이 있다. 나머지 2채의 집은 U자 형태였다.

집과 집 사이엔 외부로 나갈 수 없는 담장이 쳐져 있는 뜰이 있는데 출입은 부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벽은 수수줄기나 덩굴나무가 덮고 있으며 몇 개의 화분이 올려져 있다. 잘 사는 집엔 화분들이 많고, 부엌마당엔 우물이 있다. 우물은 식수와 생활용수를 제공해주며 여자들만의 공간이다.

부엌에는 진흙으로 된 낮은 바닥이 있어 집안의 다른 방들과 구분된다. 이 형태는 아궁이 때문에 꼭 필요한 구조이며 아궁이의 방고래들은 방안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놓은 구들장을 데우기 위한 것이다. 방고래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굴뚝으로 모이며 굴뚝은 질그릇 조각을 박은 관 형태로 지붕 위에 돌출해 있다.

오스굿이 선두포를 찾았을 당시 선두포의 가옥구조는 우리나라 옛 농촌의 전형적 모습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집은 L자형으로 돼 있고 지붕이 없는 마당이 있었으며 밥을 짓고 군불을 떼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의 모습이 그것이다.

마루는 툇마루 형태가 많았는데, 지금의 방과 방 가운데 거실 개념이 아닌 건물의 벽이나 기둥 안쪽 둘레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에 놓은 마루를 가리킨다.

툇마루는 보통 건물의 전면, 온돌방 앞에 있었다. 방에 들어오기 위해 신발을 벗고 맨 처음 올라서는 곳이기도 하다. 툇마루는 방과 방으로 이동하는 통로나 걸터앉아 마늘을 까거나 파를 다듬는 등 간단한 집안일을 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현재 선두포의 가옥은 초가집을 개량형으로 바꾼 집들과 8, 90년대 지은 집, 귀촌해서 지은 현대식집들이 혼재돼 있다.

귀촌한 사람들은 인천, 서울, 김포 등 인근 도시에서 사업을 하거나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귀촌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정족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선두포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마니산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심상점 선두2리 이장은 "물과 공기는 물론이고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살기가 좋은 마을"이라며 "강화섬쌀을 많이 생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쌀 소비가 점점 적어지는 것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선두리 마을 원로 유재용 옹 "50년 산 내 집, 평생 여기서 지낼 것"



"옛날엔 다 초가집이었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쓰레뜨(슬레이트)로 바꾸라고 해서 그 때 쓰레뜨 지붕으로 바꾼거야."

선두리 391의1 유재용(78) 옹은 1950년대만 해도 마을의 지붕은 대부분 초가지붕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고 지금은 현대식으로 지은 거라고 했다.

"나는 저 위 선두성결교회 근처에서 태어났고 이 자리엔 결혼하면서 이사온 거지. 이후 조금씩 수리하면서 계속 이 곳에서 살았어."

유 옹은 선두포에서 태어나 줄곧 농사를 지었고, 27살 되던 해 지금의 집을 마련해 50여년 간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집은 과거 초가집 모양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1974년쯤 정부정책에 따라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었고, 이후 마당에 지붕을 덮는 등 개량을 했다. 그의 집 대문은 나무문으로 돼 있었으며 한켠에 탈곡기 같은 농기계와 선풍기, 전기밥솥 등이 눈에 띄었다.

화장실은 대문 맞은편에 있는 옛날 '뒷간'의 형태였고 그 앞에 작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어려서 피난도 못 갔어. 6.25때 공산당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왔는데 그것도 다 봤지"

한국전쟁 당시 11살 소년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향 선두포를 떠나지 않았다는 그는, 앞으로도 어머니 품과 같은 고향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고향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겠어. 우리 선두포는 시원한 평야만큼 사람들 인심도 넉넉하지. 선두포로 많이 놀러들 오셔."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