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은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장조)와 부인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합장한 무덤으로, 서울 동대문 배봉산에 있던 것을 정조가 이장했다.

건릉은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것인데 둘 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혜경궁 홍씨는 노론 집안 출신으로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9살 때 영조에 의해 세자빈으로 내정됐다.

명문가 처녀 100여명이 참여하는 간택은 형식적인 절차였다.

혜경궁 홍씨는 간택이 되기도 전에 사도세자 생모인 선희궁과 누나 화평옹주로부터 예절교육을 받았다.

이듬해 10살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홍씨는 혼인식을 올렸다.

혼인 후 아버지 홍봉한은 그렇게도 자주 떨어졌던 문과 전시에 합격하지만, 세자빈 홍씨의 궁궐 생활은 고달팠다.

아침 일찍 남편과 함께 궁궐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자는 태평했다.

15세가 되자 세자 부부는 성인식을 치르고 합방을 했고, 다음 해 첫째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첫째 의소세손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18세에 둘째 아들을 낳으니 이가 정조였다.

28세 되던 무더운 여름.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잃는다.

하지만 몇 개월 뒤 만난 영조에게 홍씨는 '저희 모자가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이라 말한다.

결국 자식 없이 죽은 사도세자의 형(효장세자)의 양자가 된 정조는 왕에 오른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위해 25만평 능을 마련했다.

11살의 어린 정조는 뒤주에서 울부짖는 아버지를 얼마나 구해주고 싶었을까.

'어머니는 홍시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난 바빴고 잊어버렸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난 허겁지겁 도착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아. 홍시.'

어느 수필의 뒤늦은 후회를 굳이 반복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