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문화체육 부국장

'역사적 장소'나 '유물'이 중요한 건 그 안에 인간의 삶과 다양한 사건 등이 고스란히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하얼빈(哈爾濱)역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그저 하나의 기차역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독립운동의 현장이다. 하얼빈역을 찾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안 의사의 숭고한 독립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대한민국 사람임을 다짐할 터이다. 일제강점기의 원인과 결과, 36년간의 식민지배를 떠올리며 어금니를 꽉 깨물지도 모른다.

인천 강화도에서 판각한 '팔만대장경'을 보며 우린 먼저 선조들의 목판인쇄 판각기술에 깜짝 놀라며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대체 어떤 재료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었길래 76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뒤틀림 하나 없이 인쇄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대장경은 왜 만들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결국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모든 경전을 담은 동아시아 지식의 총체이자 인쇄술의 백미이자, 천도를 단행하면서까지 처절하게 싸운 조상들의 대몽골 항쟁정신의 총아란 사실을 깨닫고 나면 민족적 자부심이 끓어오를 것이다. 나아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발명과 같은 인류의 문명을 크게 끌어올린 나라였던 고려시대를 반추하게 된다. 국익을 철저히 챙긴 고려의 등거리 외교술을 현재 한반도의 초긴장 상황에 적용해도 좋을 거란 생각에까지 미칠 수도 있다.

인천시가 최근 표지석을 세우기로 결정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 역시 마찬가지다. 중구 북성동 3가 8의3에 표지석을 세웠을 때 이 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의 의미를 알게 된다.

우리나라가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의 준거가 됐고, 힘이 약해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일이관지(一以貫之). 공간과 유물은 이처럼 오래된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영감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자.

일본 역시 서구 열강에 문호를 굳게 닫고 있었지만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강요로 요코하마를 개항하고,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에도막부(江戶幕府) 말기의 혼란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일본이 열강과 조인한 불평등 조약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의 영사 재판권 인정, 무역에 대한 일본 관원의 불간섭 등 일본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후 일본은 이를 재빨리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연결시키면서 근현대 자본주의국가로의 발판을 마련한다.

159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을 모티브로 한 '요코하마 개항제'라는 세계적 축제를 만들어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 매년 6월이면 요코하마 앞바다에선 승선회·시승회가, 땅에선 공연이 펼쳐진다. 요코하마 개항길이라는 문화콘텐츠를 만드는가 하면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개항자료관을 세워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개항자료관엔 요코하마의 역사와 문화, 항만과 경제와 관련한 자료 25만 점을 소장하고 있다. 요코하마 항구에 있던 세관 창고는 세계적인 백화점과 공연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개항과 미일수호조규 체결의 역사적 의미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재해석해 적극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역시 불평등조약이긴 했지만 그 체결장소가 정확하고 표지석을 세우는 만큼 앞으로 이 장소를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문화관광콘텐츠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미국과의 조약 이후 이 자리에선 영국과 독일 등 서구열강과의 조약이 잇따라 체결됐으며, 싫든 좋든 이 조약들은 결과적으로 우리나라가 근현대 국가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맞이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를 근현대 건축물이 밀집한 중구 지역과 연계해 많은 사람이 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민간외교의 메카로 만들어 간다든지, 14개국의 사람들이 놀던 장소인 '제물포구락부'와의 연계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든지 하는 일이다. 다만 여전히 화도진공원이 조약체결장소임을 주장하며 화도진축제를 진행하는 동구의 경우, 재현식만 하지 않고 다른 콘텐츠는 그대로 진행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화도진축제의 내용을 봐도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모티브일 뿐, 대부분의 이벤트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화도진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연계하고 싶다면 스토리텔링은 만들기 나름이다. 인천시와 중구, 동구의 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