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식민성 문제 등 다뤄...원로정치학자 최장집 기고도
▲ <황해문화> 94호_2017봄호 새얼문화재단, 352쪽, 1만5000원
'원래 세상은 힘없는 사람들이 바꾸는 것이지 많이 배운 자들이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자들은 배웠다는 것을 무기로 권력과 자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또 권력과 자본은 그것이 필요하기에 그들에 접근하지요. 그렇기에 대부분은 그들의 편에 서게 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옆에 와서 "함께 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래도 함께 힘냅시다.' 새얼문화재단이 발행하는 <황해문화> 94호(2017봄호)는 지식인과 대중의 관계를 살펴본다. <황해문화>는 이 사회엔 많이 배운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세상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 인문학강좌가 우리 사회를 유행처럼 온통 뒤덮고 있는데도 왜 이 사회는 좀 더 나아지지 않는가. 어째서 우리 사회 모습은 더불어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대학교수들마저 저럴 수 있는가.

차승기(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지식의 식민주의로부터 어떻게 벗어날까 : '우리가 아는 세계'의 전환'에서 지식인의 초상이 일그러진 역사적 궤적, 변화된 지식의 존재 근거,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인의 입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지식-권력의 장에서 식민지 지식인들이 제국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영(陣營)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점과 냉전체제 아래 다양한 지적 작업들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이 편'의 질서를 부정하거나 위태롭게 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는 예감을 내면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미국 정부의 지원 및 후원에 따른 장학 프로그램 등을 통해 이루어진 교류가 신흥독립국들에 미국식 행정시스템과 교육제도를 이식하고, 미국 학계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론이나 방법론을 도입하게 하는 등 '친일' 잔재를 가진 행정관료를 비롯한 한국 국가기관 엘리트들을 '친미적'으로 전향시킨다고 주장한다. 특히 신흥 독립국가의 '시민사회'를 '친미적'으로 조성하여 이른바 아메리칸 바운더리(American boundary)를 구성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배성인(한신대학교 교수·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의 '대학의 상업화와 학문·지식의 사유화'는 차승기가 제기한 지식의 식민성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는 학과통폐합, 입학정원 감축, 대학 평가 등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가에 의해서 이른바 '대학구조조정'이 강제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자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대학의 기업화-상업화가 전면화됐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선도적인 대학 서열화와 대학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순응이 그 흐름의 확대를 자극한 주요 요인이며, 그 결과 지금 한국 대학은 자본이 필요로 하는 기능적 인력을 양성하는 인력공장, 정치권력이 필요로 하는 기능적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공장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김영수(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의 '학술논문 국가관리체제와 지성·지식의 소외'는 미시적 수준에서 지식과 지식인의 시장화, 규율화 문제를 다룬다. 그는 교육부와 연구재단이 학술지의 '질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국내 학술지를 글로벌 학술출판기업이 운영하는 '인용지표색인 서비스 체계', 즉 SSCI, SCI, 스코퍼스Scopus 등에 등재시키거나, 연구논문을 SSCI, SCI, Scopus 등에 등재된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을 골자로 추진하고 있는 학술연구의 국제화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구체적 자료를 통해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박권일(칼럼리스트)의 '문제는 교양이 아니다 : 대중인문학과 교양의 사유화'는 대중인문학의 사회적 의미와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는 대중인문학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교양의 사유화'이며 그것은 곧 개인 수양론을 핵심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서동진(계원예술대 교수)의 '증오, 폭력, 고발 : 반지성주의적 지성의 시대'는 비판지식과 지식인의 빈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고 있는, 또 야기할지 모르는 더 엄청난 '야만의 세계'에 대한 경고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범죄심리학(심리적 개인의 정신적 소질에서 범죄의 원인을 찾으려는 접근)과 범죄사회학(고통스런 사회적 지위야말로 진정한 범죄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접근)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에 주목한다.

이번 특집과 관련, 원로정치학자 최장집(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이 기고한 글, '한국 사회과학 발전에 관한 하나의 숙고―학문레짐의 자율성과 학문자유를 향하여'는 그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현실적 조건 속에서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제도개선의 문제를 미국 '여행 경험'을 매개로 풀어내고 있다.

촛불정국과 관련한 2꼭지의 글도 만난다.
김동춘(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의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과 한국 정치의 새 국면'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새누리당-검찰-재벌-보수언론이 박근혜라는 간판을 활용하여 기획한 역대 최악의 공권력의 사유화사건으로 한국의 신봉건국가, 약탈국가적 성격을 드러내 준 사건으로 규정한다.
'퇴진국민행동' 활동가 김덕진(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의 '수고했어 오늘도'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로 100만 촛불집회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는 이명박정권을 포함하여 그동안 전개된 촛불의 의미를 조명하고, 어째서 100만이 넘는 분노한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왔는지 매주 광화문 촛불광장과 전국 곳곳을 누비며 만난 많은 시민들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352쪽, 1만5000원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