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무관생도들>
이원규 지음
푸른사상
512쪽, 1만8500원

냉정한 필치로 '대한제국 마지막 생도 45명' 삶 조명 …  묻혀졌던 진실 밝혀내
이원규 작가, 10년 걸쳐 일본 국립공문서관 등 미공개 자료 발굴 … 소설 발간


인천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정통 리얼리즘 작가인 이원규가 무려 500여쪽에 이르는 새 장편소설을 펴 냈다. <마지막 무관생도들>(푸른사상·512쪽)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며 무관학교에 남게 된 45명의 마지막 생도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10년에 걸쳐 일본 국립공문서관 등에서 발굴한 미공개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적을 추적하며 굴곡진 근현대사의 일면을 소설적 형식으로 복원해 냈다.

이 책은 평생 정통 리얼리즘 소설을 써 온 이원규 작가가 10년 이상 자료를 찾으며 매달려온 결과물이다.

그는 책에서 대한제국무관학교에 재학하다가 1909년 폐교령이 내린 후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육사를 나온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삶을 추적한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실제 사건, 실존 인물이다.

전작 <약산 김원봉>(2005), <김산 평전>(2006), <조봉암 평전>(2013)에서 그랬던 것처럼 역사적 사실·시간·장소, 주변인물 기록 등 팩트를 절대가치로 삼되 그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한 상상력을 붙였다.

200자 원고지 1800장 분량엔 260여개의 각주가 달려 있다. 그 중 40%는 '대한제국무관학교생도 성적순 명부' 등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자료, 일본국 관보나 지방의 군(郡)신문에 실린 기사 등,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찾지 못한 1차 자료들을 다룬다.

작품의 시간축은 1908년 봄부터 광복 직후까지다. 고관대작 혹은 일부 중인계급의 자제였던 무관생도들은 일본에 순치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일본행 연락선을 탄다.

그러나 경술년 강제합방 소식을 접한 이들은 일제히 자결하자고 토론하다가 결국 육사를 졸업해 실력을 갖추고 조국이 부르는 날 탈출해 독립전쟁 전선으로 가자고 결의한다. 그러나 결국 순치당하고 말 것이라며 퇴교한 생도들도 여럿 나왔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2학년이던 상급반은 일본 육사 26기, 하급반은 27기였다. 이들을 지도한 정신적 지도자는 5년 전인 1904년 마지막 황실유학생으로 도일한 육사 23기 선배 김현충이었다. 뒷날 '백마 탄 김장군' 전설이 되어 '원조 김일성'으로 불린 김경천 장군 그 사람이다.

김현충은 생도들 중 이응준(뒷날 대한민국 육군초대참모총장), 지석규(뒷날 광복군사령관. 이청천), 홍사익(육사를 우등으로 졸업 육군중장까지 오르고 전범으로 처형) 등 3인을 지목해 요코하마 중국인 거리에서 장차 때가 오면 탈출하자고 단지맹세를 한다.

33명이 임관했고 1919년 3·1만세가 일어나자 김현충과 지석규만 탈출, 신흥무관학교로 가고 이응준은 우쓰노미야 조선군사령관에게 감화돼 가지 못 한다.

책은 광복군사령관 지석규(이청천)가 일본군 실력자가 된 홍사익 장군에게 2차에 걸쳐 탈출하라고 밀사를 보낸 기록, 홍사익이 형무소에 갇혀 있던 독립투사 현익철을 회유해 지석규가 있는 독립운동 진영에 첩자로 파견했으나 현익철이 곧장 지석규에게 자복하고 독립투쟁에 나선 일 등 독립운동사의 이면도 기술하고 있다.

김경천, 지석규보다 먼저 탈출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철호는 군사기밀을 갖고 탈출하다가 체포돼, 군법회의를 거쳐 총살형을 당하게 됐으나 육사시절 교관이던 장군의 노력으로 살아남는다. 이후 조선소년군(보이스카웃) 창설자가 된다.

이종혁은 시베리아 출정 중 동포 파르티잔을 총살한 죄책감으로 탈출, 정의부 군사위원장이 돼 투쟁하다가 체포돼 옥살이하다 죽는다. 선우휘 선생의 소설 <마덕창 대인> 주인공이다. 이동훈은 일찍 퇴역해 평양광성고보 교사로 일하던 중 제자들의 3·1만세를 지도하고 상하이 임정으로 탈출하려다 체포돼 고문 후유증으로 죽는다.

나머지 생도들 역시 탈출 결의를 지키지 못한다. 일부는 퇴역해 군사교관으로 일하고 일부는 끝까지 일본의 군복을 입은 채 패전을 맞는다. 그들은 일본의 국가총력전에 내세워져 학병 권유 강연에 나서고, 징병 업무를 맡고 민족에 해악을 끼치는 행동을 한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이응준과 홍사익, 지석규 3인이다. 이응준은 '대일본제국의 황민으로서 큰 의무인 혈세를 바치라, 희생을 바치라'고 외치며 학병 지원을 권하는 연설을 한다. 홍사익은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서 포로들을 굶기고 노역을 시켜 전범재판에 넘겨질 단초를 만들고, 광복군사령관 지석규는 미군 OSS와 제휴한 국내 진공작전을 사흘 앞두고 일본 항복 소식을 듣고 절망한다.

지석규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는 미군정의 방침에 환국하지 못하는 사이, 미군정과 가까워진 이응준은 국군 창설의 주체가 돼 자신을 추종하는 일본군 만주군 출신 경력자들로 재빨리 창군작업을 한다. 그것은 1919년 탈출해 평생 항일무장 투쟁을 한 지석규(이청천)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한국 현대사는 왜곡됐다.

이응준을 비롯한 인물들은 건국과 건군 과정에 참여하고 조국을 위해 일했지만 상당수가 2000년대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한 친일인사 명단에 올랐고, 항일투쟁의 길을 간 사람들은 광복 한참 뒤에야 훈장을 받았다.

작가 이원규는 냉정한 필치로 그들의 삶을 조명하며 묻혀진 진실을 밝혀낸다. 그는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마저도 우리 역사의 일부로 끌어 안았다. 젊은 날의 선택이 일생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이타적 애국은 물론 반민족적 배반까지도 깊이 파고들어가 인간존재의 욕망의 내면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김석원, 김영섭, 염창섭, 박창하, 이응섭, 이은우, 김인욱, 박승훈, 안병범, 정훈 등 알려지지 않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다. 백범 김구, 신흥무관학교 교장 이시영, 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범석, 약산 김원봉 등도 등장한다.

10개의 챕터로 이뤄진 책은 인물들의 만년을 정리한 에필로그, 무관생도들이 활동했던 지역을 나타낸 지도와 관련 현대사 연표 등 풍부한 보충자료도 첨부하고 있다.

이원규는 1947년 인천에서 출생, 인천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와 젊은 시절 고교 교사로 일했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겨울무지개>가, 1986년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 공모에 베트남 참전 경험을 쓴 '훈장과 굴레'가 당선됐다.

인천과 서해를 배경으로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주로 썼으며, 분단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온건하게 표현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창작집 <침묵의 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펠리컨의 날개>과 장편 <훈장과 굴레>, <황해>,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1~9)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독립전쟁 현장 답사기 <독립전쟁이 사라진다>(1·2),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공저), 평전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조봉암 평전> 등을 출간했다. 대한민국문학상, 박영준문학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모교인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로서 10여년간 소설과 논픽션을 강의했다.

이 작가는 "이 책엔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들은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1만8500원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